블랙 시네마와 스파이크 리
할리우드 내 블랙 시네마라는 분야에서 스파이크 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최근의 미국 사회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당연한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DA 5 블러드>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각본이 여러 감독과 제작자를 떠돌며 몇 차례 수정되었고, 영화라는 예술의 제작 기간을 생각했을 때, 특히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2020년 미국’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스파이크 리는 명백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BLM 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삽입하며, 베트남 전쟁 참전 병사의 이야기를 2020년 미국에 가져다 놓는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일어난 5월 25일과 영화가 공개된 6월 12일의 차이는 스파이크 리가 최근 보여주는 영화에 대한 접근론을 대변하는 것 같다. 스파이크 리는 아마 최후 편집을 마친 상태 이후에 미국 전역에 BLM 운동이 퍼진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파이크 리는 과감히 BLM 운동을 영화에 삽입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추정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각본 단계에서부터 그것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추정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시점의 차이일 뿐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최근 흑인 인권을 이야기하는 스파이크 리의 급진성이다. <블랙클랜스맨> 등 최근 그의 영화는 목적성보다는 명확한 도구로써 기능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한 이목을 집중시킨다면 그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경향성이 트럼프 시대와 맞물린다는 점은 시대정신이 퇴행하는 것이 영화의 급진성을 부여해도 좋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작에서처럼 그는 흑인 차별의 역사와 그것에 대항한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붙인다. 다만, 전작인 <블랙클랜스맨>은 KKK를 필두로 하는 미국 내 흑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DA 5 블러드>는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흑인 인권이라는 주된 관심사뿐만 아닌 ‘가해자로서의 흑인’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전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작품처럼 보인다.
연대를 방해하는 순간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바 있는 4명의 남성이 전쟁 당시 팀을 이끌었던 노먼(채드윅 보스만)의 유해를 되찾기 위해 다시 베트남에 찾는다. 노먼은 단순한 분대장이라기보다는 팀원들에게 삶의 목적을 일깨워주고,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를 가르쳐주는 블러드 팀의 마틴 루터 킹이자 말콤 X이다. 베트남을 다시 찾은 그들은 노먼의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표먼적 이유와 함께 전쟁 당시에 숨겨둔 금 궤짝을 찾는다는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존 휴스턴의 고전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1948)처럼, 그들이 보석을 눈앞에 두고 각자의 목적으로 분열할 것은 꽤나 예측 가능한 수순이다.
<DA 5 블러드>는 연대를 방해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영화는 그것을 쇼트 – 리버스 쇼트의 모습으로 담는다. 베트남을 다시 찾은 에디(놈 루이스), 폴(델로이 린도), 오티스(클락 피터스), 멜빈(아시아 위트락 주니어)는 ‘지옥의 묵시록’의 포스터가 있는 한 술집에서 가이드를 만난다. 술을 마시던 그들에게 한쪽 다리가 없는 소년이 다가와 돈을 구걸하는데, 짜증을 내며 쫓아내던 그들은 귀찮다는 듯이 돈을 쥐여주고 겨우 그 소년을 쫓아낸다. 그러다가 언뜻 반대편 테이블에서 노년의 베트남인 두 명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가이드는 그들이 과거 베트콩 출신이라고 일러준다. 영화는 베트남 전쟁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4인의 테이블과 2인의 테이블을 쇼트 – 리버스 쇼트로 담아내는데, 그것을 거칠게 편집함으로써 단절감을 부여한다. 영화는 그들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아내지 못한다. 이후 술집을 나선 그들은 난데없는 폭발 소리에 납작 엎드리는데 가짜 폭탄을 던진, 그들이 거칠게 쫓아낸 한쪽 다리를 잃은 소년이 그러한 모습을 비웃는다. 그러한 쇼트 – 리버스 쇼트 방식의 편집은 다시금 등장한다. 폴의 아들인 데이비드(조나단 메이저스)는 어느새 아버지를 찾아와 자신도 그 여정에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몫을 나눠줄 수 없다는 부모 세대와 그 몫을 차지하려 하는 자식 세대의 대화를 영화는 다시금 거칠게 편집하여 놓는다.
2020년 현재, 연대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세대 차이에서 기인하여 실패하곤 한다. 그것이 <DA 5 블러드>가 시작한 이유인데, 연대는 1960년대에는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과거 시점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1.33 대 1의 화면으로 담아내는데, 블러드가 결성되는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 꽤나 대비된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됐다는 소식을, 그로 인해 흑인들의 분노가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동시에 흑인이 미국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반면 베트남 전쟁 참전 병사 중 흑인 비율은 30%에 이른다는 정보를 전하는 베트남의 프로파간다를 들은 블러드 대원들은 분열한다. 정확히는 노먼과 나머지 4명의 분열인데, 노먼은 현재의 분노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영화는 그들의 대립을 쇼트 – 리버스 쇼트로 담다가, 측면에서 노먼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장면으로 편집하여 5명의 블러드를 한 프레임으로 담는다. 그들은 서로 주먹을 맞대는 방식으로 연대하고, 하늘에 총을 발사함으로 마틴 루터 킹을 추모한다. 그것은 1968년에는 가능했으나 현재에는 번번이 실패하는 연대의 정신이다.
블러드 5명이 찾으려고 하는 노먼의 유해와 황금은 1968년에는 있는 것과 2020년에는 없는 것, 반대로 1968년에는 없는 것과 2020년에는 있는 것을 표상한다. 1968년에는 노먼이 가르쳐주는 어떠한 정신이 있었으며, 황금을 발견했을 때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사용하자는 대의가 있었다. 2020년 현재에는 유골이 된 노먼과 같이 그의 정신이 사장되었으며 실패한 사업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신의 가족을 돌보려 하는 개인적인 욕망으로 분열된 황금 앞의 사람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들의 여정은 그래서 때때로 실패한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에까지 아른거리며, 에디는 지뢰를 밟고 사망한다. 아버지 폴은 끝내 아들인 데이비드에게 총을 겨누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 <DA 5 블러드>는 스파이크 리의 가장 참혹한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특수성이 보편성에 지워질 때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든 삶의 순간을 함께하는 원죄의 정서가 영화에는 짙게 배어있다. 폴의 아내는 데이비드를 낳다 목숨을 잃는데, 그것으로 데이비드는 모든 삶의 순간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또한 계획의 조력자인 프랑스인(장 르노)과 계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폴은 미국의 은혜를 얻은 적이 있는 프랑스인이 어떻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 화를 낸다. 미국인들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쯤 슈니첼을 먹으며 독일어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원죄는 한 집단이 타 집단에 수혜를 받았을 때, 반대로 한 집단이 타 집단으로부터 일방적인 피해를 주었을 때 발생한다. 역사의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생긴다. 한쪽 다리를 잃은 소년이 그렇게 당당하게 구걸하는 행위나 강가의 상인이 치킨을 사라며 강요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계였다면 무례하게 여겨질 영역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반대의 지점에서 원죄를 갖고 있는 진영의 사람들이 귀찮다는 듯이 그들을 밀쳐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DA 5 블러드>는 비판으로부터 한없이 취약해진다. 어떤 영화들, 특히 서부극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영화들이 주로 보여주었던 자기반성을 <DA 5 블러드>가 반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흑인이 당시 사회에서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도 사실이나, 그 전장에서 수많은 삶과 가정을 파괴한 것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영화는 오티스는 자신이 몰랐던 딸과 조우하게 하고, 너무도 쉽게 둘을 화해시킨다.
'Black Lives Matter'가 흑인 인권 운동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All Lives Matter'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황인의 인권도 심지어 백인의 인권도 똑같이 소중한데, '흑인의 인권이 소중하다'라는 문장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구조적인 불평등은 외면한 채, 모든 것이 똑같다는 보편성만을 내세운다. 기울어진 곳에서 가운데를 고수하는 것은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보편성은 때로는 특수성을 지운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성이 <DA 5 블러드>를 이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보편성을 무기로 특수성을 지우려 하는 시도 속에서 <DA 5 블러드>가 프로파간다로써, 수단으로써, 무기로써 스스로를 내던진 그 목적을 기여하였으면 좋겠다. 동시에 베트남 전쟁에서의 관계성이라는 특수성이 흑인 인권을 내세우는 목소리로부터 지워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