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습니다.
모임 나가서 애들 이야기 들어보면, 지금 번듯한 직장 취업해서 돈은 얼마를 모았다더라. 내가 생각을 했을 때 우리는 그래도 열심히 뒷바라지한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너를 보면 무언가 부족했나 싶다
퇴사 이야기를 드리고 나니 매번 하시던 말을 아버지는 또 하셨다. 흠... 이번엔 그냥 듣고 흘리려고 했는데 역시나 쉽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저를 왜 비교하시나요? 그리고 제가 그들보다 못난 게 도대체 뭔데요?"
주눅 들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주눅 들면 내가 열심히 살아온 내 과거를, 그리고 그 결과인 현재를 부정하는 거니까. 아버지가 데려온 이름 모를 엄친아가 누구던간에 나는 당당하고 싶었다.
사실 부모님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다른 가정처럼 자식들이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 들어가는 걸 바라는 그런 집이었다. 나에게 큰 기대를 거시는 것도 아니었고, "공무원이 안정적이니 하는 게 어떠니 요새 은행원을 많이 뽑는다더라 해보는 게 어떠니?" 그저 평범하게 남들 살듯이 그렇게 살길 바라셨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한 경험이 사실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성남을 벗어난 경험이 손에 꼽혔다. 부모님은 늘 불안해하셨고, 새로운 것을 할 때 위험하다며 반대하셨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사실 부딪힐 만한 게 없었다. 학교 다니고 대입 준비하면 시간이 다 가 있으니까.
문제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발생했다. 재수를 결심하고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만 공부를 했고, 나는 논술도 함께 조금씩 스스로 준비했다. 어머니와 형이 대입 때 상당한 갈등을 겪었던 것을 본터라 나는 내 대입에 부모님이 개입은 일절 막았다. 내가 모든 걸 알아봤고, 신청도 온전히 내가 했다. 하지만, 그해 수능도 망했다.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논술이 하나 남아있었다. 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다르셨다.
"명환아, 논술이 쉬운 줄 아니? 그거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사실상 나는 또 '열심히 하지만 역시나 결과가 좋지 않은 애'로 집에서는 지방으로 대학을 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당시 EBS 온라인 첨삭을 받았는데, 칭찬을 받아서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어머니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논술 시험을 보고 왔는데 느낌이 좋았다. 어렵지 않았다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시큰둥하셨다. 서운했지만, 이해는 갔다. 주변에 고액 학원을 다니면서 논술을 준비했지만 성공한 케이스는 없었기에, 나처럼 그냥 집에서 몇 번 글 써보고 대학에 간다는 게 쉽게 상상이 안 갔을 것이다.
합격입니다.
불합격, 빨간색만 난무했던 결과에, 나는 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강렬한 파란색을 봤다. 바로 나가서 어머니에게 자랑했고,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선방을 해준 것이니까. 그렇게 나의 조그마한 성취는 시작되었다.
대학교에 가니 재밌어 보이는 게 많았다. 각종 대외활동을 해봤다. 발표 동아리를 했을 때 아버지의 강한 태클이 들어왔다. '학생이 공부를 우선으로 해야지 왜 이런 거에 시간을 쓰냐, 적당히 좀 해라' 나와 아버지는 공부에 대한 개념이 달라 보였다. 나는 남들 앞에 서는 걸 잘 못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누구보다 장난기 어린 내가 여러 명 앞에만 서면 얼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많은 사람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간 동아리였고,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그게 마음이 들지 않으셨나 보다.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기를 원하셨다. 결국 하루는 사단이 나서 중요한 발표 날에 아버지가 호출을 해서 크게 한소리를 하셨다. 당시 나는 동아리 기장이었고, 다음 기수 운영진에 들어가 회장이 되어 리더십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결국 나는 동아리원들에게는 다른 핑계를 댔지만, 다음 기수는 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동아리를 그만둔 후 학교만 다니는 건 싫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는 이전에도 해본 경험이 있고, 사람을 대하는 게 재밌고, 친구들 사귀는 것도 좋아서 학교 근처에서 일을 시작했다. 학교와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최소 주 3회 이상이어야 했기에 수업 끝나고 아르바이트 가고,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갔다. 아버지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다.
"지금 전과를 했으면 학과 수업도 따라가기 벅찰 텐데 아르바이트를 왜 하는 거니?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줄테니까 그냥 공부만 집중하자"
매번 나의 행동에 태클을 거니 짜증이 났다.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자꾸 태클을 거실까... 언쟁을 벌였지만 소모적이었다. 그때 생각을 했던 게 과탑을 한번 찍어주면 저 입을 막을 수 있겠구나 였다. 그때까지 학점이 내게 중요했던 이유는 기숙사를 입사, 취업 시 방해되지 않아야 하니까 정도였다.
"내가 다음 학기 과탑을 찍을 테니까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기대감을 심어놓고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 결과로 보여주는 게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사범대 친구들이 공부를 어지간히 꼼꼼하게 해서 자신감이 조금 없기도 했다.
최대 학점 22학점 수강, 학점 4.32/4.5 39명의 2학년 학생 중 1등.
난 몇 개월이 지나면 기억 저 너머로 날아갈 활자를 외우는, 나에겐 참으로 의미 없는 활동을 부모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했다. 그리고 보여줬다. 당시에 200이었나? 장학금을 받았는데 절반은 드리고 절반은 내가 가졌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성적이 더 올랐네...?" 머쓱해하는 부모님의 그 모습을 보려고 한 학기를 달렸다. 대신 앞으로는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하면 가만히 계시길, 묵묵히 좀 바라봐 주길 바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대적 빈곤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 내가 고등학교 때 스테디셀러는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였다.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한비야, 반기문으로 인해 나는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일을 꿈꿨다.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뭐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 길이 당연히 없었다. 그냥 국제 비영리단체를 막연히 그렸다. 비영리에서 인턴십을 해봤고, 장애인,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 보육원의 애기들 등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은 누구일까 알기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지만 생각만큼 보람이 느껴지지 않았고, "하 이건 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되는데..."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느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비영리로 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한 대외활동으로 사회적 경제를 공부하고 산업혁명, 인공지능 등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키워드들이 나와, 불안한 마음에 '기술을 배워야겠구나' 야심 차게 빅데이터를 배우다가 최악의 교육에 기겁하고 나와, 스타트업에서 운 좋게 인턴을 시작했다. 이후 마케팅 에이전시를 다니다가 6개월 만에 퇴사했다. 어머니와 형은 "열심히 하니까 뭐라도 되겠지" 반신뢰 반포기로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당연히 탐탁지 않다.
얘는 지금 뭘 하는 건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직 사회가 뭔지 몰라서 방황을 하고 있구나. 내일모레가 서른인데
아버지도 내가 무언가 열심히 하는 건 인정하나 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있다고, 내 에너지가 아깝다고 판단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는 연봉과 안정성이 중요한데, 나는 이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다.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우선이다. 결국 내가 성공했다고 하는 삶도 여전히 아버지 입장에서는 실패한 삶일 수 있으니까.
퇴사이야기를 드린 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아버지는 현재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나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득은 포기했고, 그저 아버지의 압박을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나태해지지 않게 하는 소스로.
어쨌든 내가 잘 사는 반전을 보여야 하는데, 어떻게 보일 것인가.
투비컨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