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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ㅁㅎ Jun 20. 2020

F코드 신드롬

나 조차도 전염돼버린

정신과가 유일한 답안지처럼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지금 회피하는 건 너무 노골적이고, 스스로 비겁자임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멈추지 않고 무한대로 쏟아지는 거기를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막기도 역부족이었다.


그래,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냐.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적기 시작했다.


"정신병자 정도가 돼야 정신과에 가는 게 아닐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약을 먹는다고 효과가 있는 걸까... 정말?"


"부작용이 심하지 않을까? 영화 보면 오히려 약 먹고 머리가 더 이상해지는 경우도 본 것 같은데?"


"말 몇 마디만 해도 몇만 원 깨지는 거 아닌가? 한 번에 10만 원 이렇게 나오면 난 감당 못하는데..."


"저거 만약에 취업할 때 무슨 자료 나와가지고 불이익 생기면 어쩌지?"


"한번 먹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먹는 거 아닐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정신과 의사가 별거 아닌냥 치부하면 어떡하지? 애초에 의사가 돌팔이일 수도 있잖아?"


"진로가 불안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당연히 힘든 건데 나 혼자 유난 떠는 게 아닐까?"


적고 나니 깨달은 게 있었다. 형태는 다르지만 정리해보니 생각보다 고민거리가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게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이건 내 고민이지만 동시에 내 지인의 고민이자 내 부모님의 걱정이자, 사실 정신과를 가기 전 누구나 마주하는 장애물 같은 거라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엄연히 힘든 거고 치유가 필요한데 자꾸 스스로를 가해자 인척 대했다는 것이다. 내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남들보다 예민해서 문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저 시점에 딱 나를 위한 영상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이건 그냥 나잖아?"를 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마치 나를 보는 기분으로 영상이 제공하는 우울증 환자들의 이야기를 시청했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그때까지 나온 시리즈물을 다 봤다. '정신과 상담기록은 취업에 치명적일까?'처럼 내가 고민하는 바로 그 질문이 영상의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 프로젝트는 책이 출간되기 전 펀딩을 진행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진행한 오프라인 행사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여기서 알게 된 팟캐스트까지 듣자 내가 가진 막연한 불안이 서서히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정신병자 정도가 돼야 정신과에 가는 게 아닐까?

아니 힘들면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래.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닌 의사가 판단할 영역이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약을 먹는다고 효과가 있는 걸까 정말?

효과가 있대. 의사의 처방에 따라 내가 약을 먹어보면 더 명확해지겠지


부작용이 심하지 않을까? 영화 보면 오히려 약 먹고 머리가 더 이상해지는 경우도 본 것 같은데?

약을 먹을지 안 먹을지도 아직 모르잖아. 일단 상담부터 받아보자.


말 몇 마디만 해도 몇만 원 깨지는 거 아닌가? 한 번에 10만 원 이렇게 나오면 난 감당 못하는데...

몇만 원 안 하더라. 보험적용도 되기 시작했대. 부모님한테 말씀 안 드리고 충분히 혼자서 감당 가능한 정도야.


저거 만약에 취업할 때 무슨 자료 나와가지고 불이익 생기면 어쩌지?

그런 거 기업이 함부로 열람할 수 없대. 그리고 만약 내가 정신과 진료기록을 이유로 뭐라고 한다면, 그런 회사를 내가 다녀야 할까?


한번 먹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먹는 거 아닐까?

상태가 호전되면 서서히 줄이면 된대. 그리고 만약 죽을 때까지 먹게 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힘든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정신과 의사가 별거 아닌냥 치부하면 어떡하지? 애초에 의사가 돌팔이일 수도 있잖아?

의사를 잘 알아보고 가면 되지 그건. 만약 이상하다고 판단되면 병원을 옮기면 되는 거고


진로가 불안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다 힘든 건데 나 혼자 유난 꺼는 게 아닐까?

이건 질문부터가 이상한 것 같은데? 달리기 하다 넘어졌는데, 넘어지면 상처가 나고 아픈 게 당연하니까 치료 안 받을 거야? 어떤 이유로는 마음도 아프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02.. 

..7... 


전화번호를 누르고, 누를까 말까 수십 번 고뇌하던 내 검지는 에라 모르겠다며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아 진짜 눌렀네?

점심시간이려나?지금도 받나?

처음에 뭐라고 말하지?지금 바로 오라고 하려나?아 뭐 딱히 준비할 건 없...으려나? 다시 찾아볼까?


네 정신건강의학과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

.

... 그... 저.. 상담을 좀.. 받으려고 하는데요


2018년 10월 나는 가장 어려운 첫걸음을 뗐다.




당신에게 우울증 친구가 없는 이유,

다섯 번째 에피소드 마침



P.S. 저와 같은 이유로 망설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제가 보고 들은 영상과 팟캐스트를 공유합니다.


아임낫파인

뇌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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