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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Nov 09. 2020

 


 16살, 꽤나 감성적이었다. 뜨거운 어묵을 먹으면 가슴이 탔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봄이 오면 내리는 눈을 그리워했으며 겨울이 오면 곧 피게 될 꽃을 마음속에 그렸다. 여러 의미로 가난했던 그 시절엔 그림도구가 마땅치 않았고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그 당시엔 꽤나 반항적이었던 것도 같은데, 다행히 집을 쫓겨난 적은 없으니 질풍노도의 시기는 아니었다. 하기사 그때는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하고 싶었던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으니.

 

 매일 아침 친구와 같이 등교를 했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녔지만 등굣길은 같아서 하루의 아침은 항상 그 친구와 함께였다. 내가 입었던 교복은 파란색이었고 그 친구는 시뻘건 붉은색이었다. 같이 다니는 모습은 마치 태극기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색의 절반이나 차지했다.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의 집 중간지점 즈음인 한 슈퍼마켓 앞에서 만났고 그 장소를 우리만의 비밀 단어로 불렀다. 비밀이라고 해봤자 ‘알랄라’라는 촌스러운 단어가 전부였으나, 다른 친구들은 그 단어를 듣고서 그게 뭐냐고, 무슨 뜻이냐고 매번 궁금해했었다. 우린 머쓱하게 그런 게 있다며 대충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꽤나 부끄러웠을 것이다. 뭔가 거창한 걸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고작 슈퍼마켓 앞이라는 게 퍽 웃기지 않은가. 우리가 만들었던 비밀은 그렇게 우리만 해석할 수 있는 암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걸 해독하려 할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아주 깊은 날.


 그날은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의 아침이었다. 집 앞에 나와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나에게 찾아오는 것들이 있었다. 끝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 냄새, 비로부터 오는 습기와 고여있는 물웅덩이. 그리고 그 위로 뛰어올라 첨벙거렸던 소리. 주위로 흐트러진 물 조각들은 내리는 비에 섞여 나도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정말 초여름이라는 계절이랑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슈퍼 앞에서 친구를 만나 등교를 했다.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엔 뭘 먹었고, 무슨 꿈을 꾸었고, 아침 뮤비는 뭘 보고 왔는지 등 시답잖은 얘기만 늘어놓는다. 그날은 유난히도 안개가 자욱해서 보이는 것들이 흐릿했다. 눈을 비비고, 찔끔 감았다 떴다가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크게 떴을 때 저 멀리 있는 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대문 앞 은행나무였다.


 그 나무아래엔 휠체어를 탄 남자가 있었다. 우산이 없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급하게 어딜 가야 하는 건지 나뭇잎의 끝자락 근처에서 앞뒤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슬로 모션을 이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쏟아지는 빗소리가 이렇게 선명할 수 있구나. 이게 그런 거구나. 우산을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는 생각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그 높이는 마치 떨어지는 비의 양과 같아서 나는 몇 분 동안 숨을 참아 내는 것과 같았다. 그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빠르게 뛰었고 꽉 움켜잡았던 우산 손잡이는 뜨거워졌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애써 무시했다.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감정들이 뒤섞여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 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멈췄다. 소리가 멈추고, 비가 멈추고, 시간도 멈췄다. 그곳엔 나와 그 사람, 오직 둘 뿐이었다. 마음이 아려왔다. 비가 닿을 듯 말 듯 한 경계가 이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이라니. 여름날의 부슬비가 이토록 야속할 수도 있는 거였다니. 마음 같아서는 내리는 빗방울을 내가 이 사람의 몫까지 전부 젖어주고 싶었다. 하늘에게 비를 잠시만이라도 멈춰달라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속으로 목매어 소리치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을 지나치고 말았다. 나는 우산을 주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뭐가 무서워서 우산을 주지 못 했던 걸까. 나야 파릇파릇한 10대였으니 비를 맞으며 뛰어가도 괜찮았을 테지만 그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이상 그 순간이 참으로 아찔하지 않았을까. 대문을 지나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심장이 쿵했다. 후회였다. 나는 곧바로 나무가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지만, 그 사람은 비를 맞으며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흐릿한 그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생각이 들었던 나의 모습. 나라는 사람은 이토록 망설이는 사람이었나. 경계를 넘지 못하는 사람 대신 비에 젖어주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나. 들고 있던 우산에 빗물이 샜다. 아. 애초에 나에겐 우산은 필요가 없었구나. 내 마음에도 구멍이 나버렸네.


 그날 이후로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2개씩 챙겨 다녔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고, 만난다면 주저 없이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겠다는, 내 아련한 마음이었다. 비가 오기를, 그 시절엔 많이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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