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흥얼거리는 걸 좋아합니다. 빨래를 갤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부르기 어려운 날엔 마음속으로 부릅니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바뀌는 노래는 늘 1절에서 끝나버립니다. 학창 시절에는 유선 이어폰을 가지고 다녔는데 중학생 때는 MP3로, 고등학생 때는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들었습니다. 음질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으나, 노래 취향은 늘 같았습니다. 힙합보다는 발라드를 좋아했고, 신나는 노래보다는 슬픈 노래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루마라는 피아니스트를 가장 좋아했어요. 기억에 남는 곡은 '기억에 머무르다'였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린 날 우연히 들었던 그 곡은 제목 그대로 제 기억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죠. 울고 싶은 날에는 집 앞 가로등 밑에 쭈그려 앉아 들었던 노래였습니다. 우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서 늘 혼자 있을 때 들었지만요.
과거에는 소몰이 창법이라고 목소리를 낮춰서 부르는, 마치 동굴을 연상시키는 목소리가 유행이었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신나는 댄스곡도 소몰이로 부르곤 했습니다. 다들 변성기가 오지 않아 이렇게 부르는 게 맞냐며 서로 물어보곤 했더랬죠. 언젠가 꼭 이런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다짐했을 때 옆에서 편하게 부르는 친구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목소리는 타고나야 하는구나 말이죠. 그러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 앞에서 두성이랍시고 마이크를 머리 위로 들지를 않나, 시키지도 않은 코러스를 넣어 분위기를 깨지 않나, 그땐 서로 웃으며 멋을 포기하고 재미만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어폰은 항상 왼쪽 귀에만 꽂아 들었습니다. 왜 왼쪽 귀냐면, 손에 잡히는 건 늘 왼손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 때도, 지갑을 들 때도, 핸드폰을 볼 때도 그랬습니다. 오른손은 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마음이었나 봅니다. 노래를 듣지 않을 때는 이어폰을 목에 걸고 다녔는데, 나름 패션 아이템이기도 하거니와 틈만 나면 왼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핸드폰은 늘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습니다. 한쪽으로만 듣는 노래는 그 느낌도 반쪽뿐 일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 와닿을 때가 많았습니다. 오른쪽 귀에는 흩날리는 벚꽃 소리라던가, 잔잔한 바람 소리라던가, 눈이 내리는 소리라던가 말입니다. 이것은 노래가 아니지만, 화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연하게 두 귀가 같이 들려온 날에는, 노래가 아닌 음악을 들었던 것입니다.
노래는 감정을 담은 언어라고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향수인 것도 같습니다. 친구들과 바다로 놀러 갔을 때 들었던 노래의 첫 소절은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이었고, 사랑에 빠졌던 날 노래의 첫 소절은 '우연히 그댈 처음 본 순간'이었고, 좋아했던 마음을 거절당한 날 노래의 첫 소절은 ‘천일동안'이었습니다. 바다를 보면, 사진을 보면, 유행가 속의 가사를 보면 무릇 그때 들었던 노래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가끔은 혼자 가사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부터 좋아하게 된 노래는 첫 소절을 독백으로 시작한 후 반주가 나옵니다. 괜스레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첫 소절은 ‘어떻게 전할까 널 향한 내 진심’이었습니다. 이것은 헤어진 뒤 그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노래는 절절한 사랑이야기이었습니다. 마지막 소절은 '사랑을 알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였습니다. 이것은 막상 연락이 왔을 때 내가 진심으로 할 수 있었던 말은 저것뿐이었다, 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가사 읽는 걸 좋아합니다. 심지어 가사를 읽고 난 후 노래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일 수도, 누군가의 여행일 수도, 누군가의 사랑일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가끔은 가사를 직접 만들어 부르기도 했지만, 살면서 작사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지라 부끄러움은 항상 제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참 좋아했어요. 그 가사는 나의 시였고, 나의 여행이었고, 나의 사랑이었기에 그 이야기는 나만 적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