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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과거는 머무르지 않고 흘러오면서

DAY 4 로마 버스 투어

콜로세움에서 남서쪽 대전차경기장(Circus Maximus)과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에 들른다.

대전차경기장은 로마 최초이자 최대의 전차경기장으로 인류 최초의 초거대 위락시설이라고 볼 만하다. 콜로세움 수용인원이 최대 8만 명인데, 대전차경기장은 최종 확장 시 수용인원이 27만 명이었다고 하니 지금도 넘보기 힘든,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경기장이다. 27만 명이라면 우리 여수시 정도와 맞먹는 인구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2층 객석 붕괴사고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이었다고 한다. 1만 명이면 현대 의료 수준으로 따져도 병원 100개 정도는 필요할 것 같은데, 이래저래 믿기 힘든 숫자이다.

원래 모델이 되었던 그리스 전차경기는 일반인 아마추어들이 하는 취미 수준으로서 40명이 1바퀴를 뛰었는데, 로마에서 프로경기가 되면서 12명이 4두 마차로 7바퀴를 달렸다. 반환점에는 청동동상 7마리가 있어 랩타임을 표시해 주었고, 주로 중앙분리대 부분부터 속력을 내었으며 반환점에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간 전차들은 실격되었다. 이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서 F1 드라이버들이 20명으로 한정되나 보다. 머신들이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서 튕겨 나가는 것도 비슷하고. 인간의 스포츠란 아마추어들이 놀 때는 참여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프로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확실히 한정된 선수들이 기량을 보이는 것을 즐기게 된다. 올림픽 야구와 MLB 간의 차이와 비슷한 것 같다.

로마의 프로 전차경기에서 <벤허>처럼 전차를 무장화 하거나 기수가 무기로 상대선수를 해치는 일은 불가능했다. 대전차경기는 오늘날로 치면 경마와 같아 경마인들로서는 정정당당하게 승리하지 않은 선수에게는 극심한 분노를 표출했다. 과천 가서 보면 정정당당하게 당한 패배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이던데, 물론 먼 옛날에는 언어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무기를 든 글래디에이터는 투기경기장에서만 가능했다. 폭력은 UFC에서만, 경마장에서는 경마만 하라는 것이구만. 민중 위락을 위한 경기인만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관람이 가능했다. 다만 황제와 귀족들은 경기장에 직접 오지 않고 경기장이 잘 보이는 팔라티노 언덕의 개인 별장 도무스(domus)의 발코니에서 VIP석 관람이 가능했다. 경기장은 U자형 구조로서 3면에 좌석이 있고 때때로 경기장 가운데에서 콘서트와 축제가 열렸다. 운동경기장에서 콘서트라니, 인류라는 게 이렇게 발전이 없을 수가 있나. 대전차경기장은 다른 로마 여느 평지가 그러하듯이 관리를 하지 않으면 테베레강의 범람으로 항상 전염병의 발원지가 될 뿐이었고, 로마 멸망 이후 다시 퇴적물이 쌓여있다가 이제야 발굴하고 있는 상태이다. 




인근의 '진실의 입'으로 이동했다. 유물의 보고 로마에서 발굴된 만큼 수천 년 역사를 지니고 있겠지만 '진실의 입'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겨우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던 돌덩이가 영화 단 1편으로 글로벌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문화의 힘이란 또는 군중의 열광이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왜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 유독 몇 팀만이 생존하는지. 또는 몇 년 뒤에 부활하는지. 완벽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 등 반드시 성공할 것만 같던 연예인이 얼마 가지 않고, 무색무취한 것 같던 연예인이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는지. 한 길 사람 속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오드리 헵번을 속이고 그레고리 펙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었을 때 정말 손이 잘린 것처럼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드리 헵번의 혼비백산했다가 분한 마음에 앙탈 부리는 모습은 그 당시 연기상에 비추어 봤을 때 약간 독특하게 생생하다.

'진실의 입' 모델은 강의 신 홀르비오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한 기원도 원래의 용도도 알려진 바가 없다.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 돌이 1톤이나 된다는 점, 재료가 수입대리석이라는 점, 돌 전체에 비해 물이 들고날 수 있는 구멍이 너무 작다는 점 등에서 반박당한다. 아마 강의 신을 조각했으니 어느 분수나 건물을 장식하지 않았을까 예상한단다. '진실의 입'으로 행세하게 된 것은 중세시대, 사람을 심문할 때 손을 집어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데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그 암흑의 시대는 무시무시해서 진실을 말하더라도 심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손을 자르도록 미리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마녀사냥이 괜히 마녀사냥이 아니다. 불에 태워봐서 타 죽으면 사람이었고, 살아 나오면 악마의 수하이니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녀사냥을 당하는 쪽이 마녀가 아니고, 시행하는 쪽이 마녀이다.




'진실의 입'이 현재 부착되어 있는 건물은 산타마리아인코스메딘 성당이다. 이곳에는 성 발렌티누스의 유해가 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추모하는 밸런타인데이의 주인공, 미혼남녀의 수호성인이다. 미혼남녀의 연애사에는 대충 항상 애절함이 깃들어 있다. 

로마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는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들에게 결혼을 금지했다. 아무래도 아저씨보다는 혈기왕성한 총각이 더 잘 싸우리라는 예상에서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혈 연애 중이던 남녀들은 지엄한 황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인서약을 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아무래도 클라우디우스 2세는 하지 말라면 기어코 더 하고 말려는 인간의 심리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사제들이 다들 처벌이 무서워 혼인서약 해주기를 주저하는 가운데, 성 발렌티누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쾌히 자신을 찾아온 예비부부들의 주례를 선다. 그러다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되어 서기 270년 2월 1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2월 14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견이 분분하다. 서양에서는 2월 둘째 주부터 새들이 짝짓기 한다고 믿는 속설이 있어, 이 날을 '공식 짝짓기의 날'로 여기기로 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역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성 발렌티누스를 기리기 위해 밸런타인데이를 창설한 기록은 없다. 기원은 오히려 고대 로마인들의 이교도 축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즉 로마인들은 2월 15일 자신들의 시조인 로물루스 형제를 기리는 루퍼칼리아 축전을 열었는데, 교황 겔라시우스가 496년 이를 금지하고 대신 2월 14일을 무슨무슨 데이로 기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무슨무슨 데이 이름을 붙이기 위해 찾은 것이 성 발렌티누스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1969년 로마 가톨릭의 성인력이 개정되어 성 발렌티누스가 성인 명단에서 제외되기 전까지 이 축일은 유지되었고, 이후로도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밸런타인데이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과거에는 밸런타인데이에 부모와 자식 간에 감사와 사랑을 담은 카드를 교환하였지만, 어느 순간 남녀 간의 애정 표현으로 변질되었고, 일본 아무개 회사의 상업적 농간에 의해 초콜릿 매상만 신경 쓰는 날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최초가 가장 아름답고 그 이후부터는 다 변질되어 버리는 것 같다. 과거는 흘러오긴 하지만 위에서부터 아래로, 맑은 물에서 혼탁한 물로 흘러내려오는 것 같다.




콜로세움에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는 도중에 고대 로마를 통과하게 된다. 무솔리니가 역사 유적 위로 개선행진을 하고 싶다는 당당한 포부에 따라 콜로세움에서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도록 포로로마노(舊 포룸로마눔, Forum Romanum)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신박한 미친놈이라고 해야 되나. 무식한 놈이 용감하면 사달이 난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이탈리아는 참패라 말하기조차 애매한 전쟁을 치렀으니, 조상 잘못 모시면 천벌 받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별론으로 세계대전 전장에 나선 이탈리아군에 관련된 일화들을 모으면 유머 모음집이 된다고 한다.




포로로마노는 지금으로 보자면 읍내, 시내이다. 포로로마노는 로마에서 보기 드문 꽤 넓은 평지에 있다. 원래 로마 테베레 강 유역은 여타 강들과는 달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다. 빈번한 강의 범람과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사람들은 강가를 떠나 언덕으로 도망갔다. 로마의 일곱 언덕(퀴리날레, 비미날레, 카피톨리아노, 에스퀼리노, 팔라티노, 첼리노, 아벤티노)에 최초로 정착했고, 그중에서도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현한 '로마'가 훗날 일곱 언덕을 모두 점령하게 된다. 어쨌든 사람들이 곳곳에 정착한 이후 언덕들 상호 간에 물물교환과 통신교통이 활발해지자, 점점 언덕 아래 평지로 진출했다. 역설적이게도 고대 로마에서 '포룸(forum)'은 주변부라는 의미였지만 실제 위치는 언덕들의 가운데인 중앙이었고, 오늘날 광장이라는 의미의 포럼(forum)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된다. 원래 로마 이전 원주민들은 이 평지에 시체를 수장하곤 했는데,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노 프리스코왕 시절 대하수도(Cloaca Maxima) 건설과 간척사업을 통해 이용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였던 평지 로마광장은 시장으로 이용되었고, 이어서 법정, 공회당 등 관공사, 나아가 신전이 세워지면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로로마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무대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사랑해 마지않는 로마 자수성가의 표본, '황제'의 어원 카이사르다. 모순적으로 카이사르는 '황제'가 된 적이 없다. 황제가 되기 직전에 살해당했다. 카이사르의 생애는 영웅 일대기의 정석이다. 혹은 현대의 영웅서사가 카이사르를 본 따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공화정 로마 시대,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벌족파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숙청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카이사르는 민중파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여 10대에 이미 살생부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위협 속에서도 좋은 인사성과 바른 행실을 강조한 모친의 가르침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청년 카이사르는 어찌저찌 변호사로서 포로로마노에 사무실을 개업하여 근근이 살림을 유지하며, 마흔까지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와중에도 깡은 있었는지 당대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와 그가 선임한 최고의 변호사 키케로를 상대로 끊임없이 소를 제기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승소만 하면 패자의 재산을 일부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우연히 벌족파와 혼인을 계기로 43세에 집정관이 되었으나, 오히려 벌족파 권력을 타파하는 데 힘쓴다. 살생부 진행을 개시한 벌족파는 집정관 임기 1년이 끝나는 대로 카이사르를 암살하고자 하고, 이를 눈치챈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갈리아 원정을 떠난다. 그는 7년의 원정을 눈부신 승리로 장식하고 로마로 개선 승진한다. 그러자 귀족들은 '사령관 임기는 5년인데, 2년이나 지체하여 귀국하는 것은 반역이다.'라는 논리로 카이사르의 입국을 금지한다. 로마 앞을 흐르는 루비콘 강(이라고 쓰고 냇물이라고 읽는다)에서 카이사르는 '내가 이 강을 건너면 인간사가 비참해질 것이지만,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로마가 비참해질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명언을 남긴다. 그리고 진격한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그를 저지하던 폼페이우스를 이기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를 남긴다. 종신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화폐와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권력 타파를 지속한다. 카이사르가 태어난 연중 일곱 번째 달은 7이라는 의미의 '셉트(sept, 후에 9월은 September가 됨)'를 빼앗기고 '율리(July)'가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동일하게 8이라는 의미의 '옥트(oct, 10월은 October)'를 밀어내고 연중 여덟 번째 달을 '아우구스트(August)'로 만든다.

민중 사이에서 높아져 가던 인기와는 반대로 불만이 쌓여가던 원로원 귀족들은 결국 카이사르가 56세가 되던 해 암살한다. 폼페이우스 극장의 회랑을 지나는 카이사르를 단검으로 수차례 찔러 살해하였다. 자신이 무찌른 폼페이우스를 기리는 회랑에서 죽음을 맞이하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셰익스피어가 묘사하기로 죽어가는 카이사르가 남긴 마지막 말은 "브루투스, 너마저?(And you, Brutus?)"이다. 영어도 극적이지만, 한글 번역이 정말 입에 찰지게 붙는다. 오죽하면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밴드도 생겼을까. 죽은 카이사르는 포로로마노의 제단에서 화장되었으나, 뼛가루가 땅에 스며들어 따로 봉안하지는 못했다. 카이사르가 화장되었던 제단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와서 헌화를 한다. 몇 천 년 전의 사람을 추모하다니, 사람의 상상력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영웅이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로마는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움막에서 생활하던 로마인들은 불과 몇 세기 만에 대리석으로 된 고층건물을 건축하고, 정복하는 곳곳에 광장시스템을 이식했다. 나라를 사람으로 비교하자면 로마는 무엇이든 습자지처럼 빨아들이는 유아기를 거쳐 청년기로 이행하는 중이었다. 고대 에트루리아의 개관시설처럼 선진기술을 재빨리 습득하고, 폼페이의 가능성을 알아보아 해양중개 무역도시로 발돋움시켰다. 귀족정에서 공화정으로, 다시 제정으로, 그리고 분리된 국가까지 정체를 바꾸면서 천년 넘게 살아남았다. 세계적으로 천년 이상의 통일된 역사를 지닌 나라는 로마와 통일신라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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