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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네로와 콘스탄티누스의 뒤바뀐 가십

DAY 4 로마 버스 투어

로마 시내와 근교를 돌아볼 수 있는 버스 투어를 가는 날이다. 날도 춥고, 소매치기도 무섭고, 대중교통을 별로 이용하고 싶지 않을 때 투어는 효율적인 선택인 것 같다. 경로는 로마 시내의 콜로세움, 대전차 경기장, 진실의 입, 포로로마노, 캄피돌리오 광장, 판테온, 나보나 광장을 갔다가 근교에 있는 산칼리스토 카타콤베, 아쿠아 클라우디아 수도교, 성 바오로 참수성지인 트레폰타나 성당을 보고 다시 로마 시내로 돌아와 트레비 분수, 스페인계단을 보고 끝난다.




가장 먼저 콜로세움으로 출발했다. 로마 아니 이탈리아의 랜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콜로세움이다. 막대한 크기는 차치하고 고대에 그렇게 큰 건물을 그렇게 과학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건설했고, 그 건물을 민중 위락과 동원을 위하여 활용했다는 점에서 건축학, 역사학, 사회학 등 모든 학문적인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타원형 건물로 긴 지름은 187미터, 짧은 지름은 155미터에 넓이 7천 평이 넘고, 층수로는 4층이지만 높이는 48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건물이다. 라틴어 '거대한(colossus)'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구현해서 거기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건물의 원래 명칭은 '플라비아누스 원형극장(Amphitheatrum Plavium)'이었고, 그 근처에 30미터짜리 진짜 '거대한' 네로 황제 청동상이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것 옆에 있는 경기장'이라는 말이 줄어들어 '콜로세움(現 콜로세오, Colosseum)'이 되었다고 한다. 

네로 황제 청동상은 후에 아폴론의 얼굴로 바뀌어 6세기까지 존재했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여실 없이 드러난다. 다른 나라였다면 네로상을 둘러싸고 혐오자와 숭배자 간 철거와 혐오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 가운데, 듣도 보도 못한 신원미상인이 나타나서 동상을 파괴해 버리는 반달리즘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범죄를 막지 못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동상 복구를 위해 성금을 모금하고 일부 세력은 복구를 반대하기 위해 무력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모금된 성금은 소리소문 없이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어디에서나 이런 코미디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지만, 로마인들은 애당초 그 싹을 잘라버리듯이 또 한편으로는 '쿨'하기 그지없게 악명 놓은 전임 황제의 얼굴에 인기 많은 신의 얼굴을 덧씌워 버렸다.

네로 황제는 악명만큼이나 콜로세움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콜로세움에서 잔인한 살육극을 즐겼다는 오해가 있다. 사실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하였으므로 콜로세움을 보지도 못한 네로는 억울할 뿐이다. 또 다른 설에는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노래를 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후대의 역사가들이 팔리기 좋게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며 전혀 사실무근이다. 

모친 아그리피나가 집념의 화신으로 황제를 암살하고 네로를 즉위시키기는 했지만, 네로의 원래 꿈은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을 사랑했으며, 원체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다. 게다가 네로는 이전 황제들과 같은 위엄이나 강력한 권력이 부족했다. 자신 있고 배짱 넘치게 폭정을 저지를 위인이 못됐다. 오히려 소심한 평화주의자였던 네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적국에 어마어마한 거액을 선물했으며, 검투사 경기조차도 잔인하다는 이유로 폐지해 버렸다. 즉위한 이후 모친을 암살하고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가 강한 왕권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거나 대단한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니라 친지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반역을 꾸밀까 봐 소심하고 겁나는 마음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결론상 네로는 유흥과 향락을 좋아하긴 했으나, 모국을 전소시킬 만큼 미치거나 광란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로마 대화재는 서민들의 주거지와 일터뿐 아니라 네로 자신의 수집품들도 파괴시켰다. 민중들에게도 꽤 지지를 받고 나름 만족스러운 황제생활을 하고 있던 네로가 직접 불을 지를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화재가 어느 정도 진압되자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호수공원을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본인이 거기서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로가 화재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화재는 네로를 망가뜨렸다. 거대한 재난 앞에 분노에 찬 민심은 우두머리에게 향했다. 사람들은 유희와 향락을 좋아하는 황제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오해했고, 이에 네로는 반대급부로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황제와 민중 간의 끝없는 신경전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기독교계에서 네로의 이미지는 적그리스도, 악마가 되었다. 

로마 대화재로부터 단 4년 후, 인기는 하락하고 황권은 몰락했다. 아마 네로를 폭군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 4년의 기간을 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황제를 조롱한 사람도 처형되었다. 속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전염병까지 돌았다. 그는 간통을 위해 조강지처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 마지막에 네로는 반란군의 압박에 도망가서 하인의 도움으로 자살한다. 네로는 폭군이라고 하기도 아까운 '한심이'이다. 하지만 그는 무력과 위력으로 권세를 누리려고 했던 이전 황제들과는 다르게 인기와 매력으로 시류에 영합하려는, 노력하는 황제상을 보여주었다. 아마 마키아벨리가 제일 싫어했을 인물이다.

사람들이 네로를 콜로세움에 연관 지어 입방아에 올렸던 것은 아마 유흥과 향락을 좋아하는 네로 황제의 이미지가 위락과 파티의 현장 콜로세움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가십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콜로세움은 아치의 건물이다. 각층마다 아치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아치문은 총 80개이고 각 아치문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이상하게 76번까지밖에 없다. 4개는 최고위층 출입을 위해 전용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황제와 귀족들이 사용했던 문은 황금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파편만 남아 있다. 관객들은 입장권으로 쓰이는 도자기 조각을 들고 자기 자리에 착석했으며, 건물 통로가 넓고 문이 많아 유사시 대피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의 복도는 한 사람 들고나기도 어려워 보이더구먼, 콜로세움 복도는 광활하게 해 놓은 것을 보면 로마인들의 성정은 모 아니면 도였나 보다.

건물 제일 꼭대기 4층에는 벽 중간중간에 돌이 하나씩 튀어나와 있는데, 이곳에 나무막대기를 꽂고 천막을 연결하여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썼다고 한다. 상암월드컵경기장 꼭대기의 돛과 비슷한 성격이었나 보다. 그리고 원래 아치돌마다 구멍이 있어 돌과 돌을 연결시키는 쇠 이음새가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가 전시물자로 뜯어갔다. 베르니니는 다른 작품을 만들기라도 했는데, 무솔리니는 귀중한 재산을 훔쳐다다 꼬라박아버렸다.

최초에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 '모의해상전투(naumachia)'를 모사하거나, 고전극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물을 빼고 나무바닥 운동장을 만들면서 검투경기장으로 변경되었다. 정부가 건립할 때는 '공공목적을 충족하는 군사시설'로 계획한 듯하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마련이다. 검투경기에서 흘린 피 때문에 나무바닥이 썩었기 때문에 모래를 깔았다. 이 모래의 원래 이름이 '아레나(arena)'였고, 오늘날 경기장의 뜻으로 사용된다.

1349년 로마 대지진으로 콜로세움 남쪽 벽이 무너졌는데, 이후 복구할 때 예산이 부족했던지 원래 모습 그대로의 완벽한 원통으로 복구하지 않고, 파괴된 부분을 사선으로 처리하고 바깥에서 안쪽 껍데기까지 보이게 만들어 놨다. 그렇게 해놓으니 아치가 겹겹이 보여 현대식 디자인이 가미된 세련된 건축물처럼도 보이고, 입장하지 않는 여행자도 꽤 안쪽까지 구경할 수 있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애초에 콜로세움은 닫힌 문이 없고 열린 아치로만 구성된 공간이라 바깥과 안의 경계가 없는 신기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이든 중첩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콜로세움과 같이 벽마다 아치문이 있고 그 아치문이 엇갈려 나 있어 안쪽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고, 대갓집 한옥의 창호문이 겹겹이 닫혀 있다가 하나씩 열리며 안쪽의 상석과 병풍이 보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사람의 심리는 완전히 개방된 것보다 보일 듯 말 듯 은밀하게 보여주는 것에 더 끌리기 마련인가 보다. 

로마 남쪽 EUR 지역에 '문명의 궁전(Palazzo della Civilta Italiana)'이라는 펜디 본사 건물이 있다. 외관은 사각 입방체인데 각 면을 빼곡하게 54개의 아치로 채웠다. 현대 버전의 콜로세움으로 놀랍게도 무솔리니 정권이 세계박람회 개최를 준비하면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콜로세움 근처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다.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던 건물이고, 주제는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 황제에게 승리하는 내용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의 환상을 듣고 나서 군대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리고 진격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로서 로마에서 박해받던 기독교를 공인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발행함으로써, 기독교의 공식적인 확장을 개시하였다. 

십자가의 환상 일화는 흥밋거리를 만들기 위한 극적인 요소라고 생각되고, 사실상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선견지명과 포용적인 태도 덕분에 기독교가 인정되었다고 본다. 너와 내가 평등하게 사랑하자라는 모범적인 구호는 서민들이 듣기에도 아름답고 국가적으로도 사회통합을 위해 유용해 보인다. 당시 로마의 세력은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이미 서쪽으로는 영국, 스페인, 북쪽으로는 독일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어서 황제도 4명으로 나누어 담당하고 있었다. 제국의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 간 거리가 너무 멀어지고 국민의 다양성이 확대됨을 넘어 자칫 분열의 위기까지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사회통합을 위한 슬로건이 반드시 필요했다. 기독교가 확산되고 있는 하층 계급과 동부 로마지역을 포용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목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사회를 연착륙시키고 새로운 피를 안전하게 수혈하기 위해 새롭게 뜨는 패러다임을 수용하기로 했다. 기독교 세력의 규모나 파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우리로 치면 '90년생이 온다' 'MZ세대'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결정은 훗날 로마 제국을 이어 세계를 장악하는 '기독교 제국'이 되는 시초가 되었다.

한 가지 모순적인 것이 콘스탄티누스 개인의 생애를 놓고 볼 때, 기독교를 공인한 것 외에 기독교인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행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가 히스패니아, 브리타니아와 함께 갈리아, 게르마니아 지방을 통치할 때, 민중봉기와 반란이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진압하고 몰살했으며 반역자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참혹하게 처벌했다. 아레나의 사신은 네로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였다. 다른 황제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을 향해가면서, 마지막 동방정제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고서는 그를 귀양 보냈다가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사형시켜 버렸다.

최악의 행태는 친아들 크리스푸스에 대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푸스의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야만족 반란을 진압했고, 리키니우스와의 결정적인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훗날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고문 끝에 죽였고, 파우스타도 목욕탕에서 질식사를 위장하여 죽였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종국에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바로 직전에 현세의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죽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만행에 실제로 죄의식을 느꼈는지는 의문이다. 그 모든 일들이 황제로서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천국이 있고,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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