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대협 May 23. 2024

신께 바치는 보석함, 시스티나

DAY 3 바티칸 시국 투어

근현대관을 지나 시스티나 성당에 진입했다. 이제부터는 미켈란젤로의 영역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사진 촬영 금지이다. 분위기도 매우 특이하다. 백 평이 넘는 면적에 5층 정도 되는 강당 같은 공간인데, 건물 벽을 따라 의자가 쭉 늘어서있다. 다리 아픈 사람들, 고개 아픈 사람들 앉아서 보라는 것이다. 거기 앉아서 고개를 들면 천장에 그림이 있다. 그 강당 같은 공간을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조류처럼 느릿느릿 여기저기 천천히 움직이며 관람한다. 수용소 체육시간에 다 같이 나와 마당을 도는 듯한 느낌이다.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가끔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면 안내원이 마이크에 대고 경고하는 소리가 메아리쳐 올려 퍼진다. "실렌치오(Silenzio)! 사일런스(Silence)! 노 포토 플리스(No photo, please)!"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성당으로 치면 제단 쪽이다. 그 제단 뒷벽에 <최후의 심판>이 있다. 그리고 성당의 천장에는 천장화 <천지창조>가 펼쳐진다. 시스티나 성당에 입장하여 <천지창조>를 막 보고 눈물을 쏟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감수성 수준에서 그건 좀 과장인 것 같다. 

일단 성당에 입장하기 전에 가이드께서 수많은 일화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생애와 고통스러운 노력, <천지창조>의 창작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다.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메마른 가슴에 은총과 축복이 단비처럼 스며드는 느낌이 들고, 감정이 충만한 상태로 입장한다. 그러나 성당은 인공조명이 없어 어두침침하고 벽 높은 곳에 나있는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희미하다. 고개를 들면 희끄무레한 저게 그 아까 설명으로 익힌 천장화 그림인가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다 정신 차리고 차분히 하나씩 들여다보면 아까 배운 내용들이 있구나 하면서 익숙해진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대단하다, 엄청나다,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어떤 예술작품도 작가의 인생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인생에 대한 글을 읽고 설명을 들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느꼈다. <천지창조>니 <최후의 심판>이니, 예술작품들은 그저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 남긴 증거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천지창조>는 창세기 중 아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빛과 어둠, 그다음에 해, 달, 지구, 그다음에 땅과 물,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창조, 선악과의 유혹과 추방, 대홍수와 노아의 생애 등에 대한 묘사이다.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한 말 듯한 '아담의 창조' 장면은 천장화의 순서대로 보면 4번째에 있다. 미묘한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손가락끼리 닿는 연출을 기획한 천재적인 아이디어는 역시 미켈란젤로라는 찬사가 절로 나오게 하면서, 깊은 밤중 보는 사람 아무도 없을 때 저 두 손가락이 실제로는 맞닿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하게 만든다. 바사리는 "아담의 아름다움과 자세, 윤곽은 유한한 인간의 그림이나 붓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최초이자 최고의 창조자에 의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라고 평했다. 이 장면에서 한때 또 이목을 끌었던 점은 하느님이 천사들을 이끌고 망토를 휘날리는 모습이 인간의 뇌와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망토의 끝자락과 일부분이 대뇌와 연수 등 뇌의 각 부분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설이 있으나, 과연 사실인지 혹은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 나로서 미켈란젤로를 다시금 존경하게 만들었던 사실은 그가 애초부터 이 중요한 천장화의 최종적인 완성도를 염두에 두고, 작업 순서를 창세기상 시간이 흘러가는 순서에 맞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에 대해 충분히 자신감이 없었고, 그래서 경험이 쌓여 완숙한 노련미가 생겼을 때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장면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먼저 창세기에서 상대적으로 뒷부분의 이야기인 대홍수와 노아의 만취 부분을 먼저 그리고, 그다음에 선악과의 유혹, 이브의 창조, 그리고 아담의 창조, 이후 빛과 어둠의 창조 순으로 그려나갔다. 그 결과 처음 그렸던 노아의 생애 부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다단하게 모여있는 빡빡한 그림으로 채워진 데 반해, 창세기상 앞부분인 아담의 창조와 세상의 창조는 충분한 여백 안에 압도적인 하느님의 이미지가 강조되었다. 축약과 강조의 효과는 극적인 연출을 통해 감동을 고조시킨다. 천장화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입구 반대편 끝부분에서 보면 제단 벽화인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의 앞부분 '세상과 아담의 창조'가 한눈에 조망되는 것이 마치 신의 눈으로 세상의 시작과 끝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시스티나 성당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직육면체 상자 안쪽에 빼곡히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형상일 진대, 이는 분명 하느님께 바치는 보석함을 만들 궁리에서 나온 미켈란젤로의 의도였을 것이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이 그림은 가로세로 10미터씩을 가뿐히 넘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보려면 입구 반대편 출구까지 가야만 가능하다. 삶의 마지막에 가서야 인류의 마지막을 관람할 수 있다는 은유일까. <최후의 심판>에는 300여 명이 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간들은 당연히 고통 속에 울부짖는다고 쳐도, 예수의 곁을 따라 천국으로 가는 인간들에게서도 함박웃음 또는 환희의 파안대소는 보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인간적 한계이다. 

미켈란젤로라는 인간은 살면서 호탕하게 웃은 적이 한 번이나 있을까 싶다. 자화상은 물론이고 어느 그림에서도 조소는커녕 눈살만 찌푸리고 있다. 성질머리 더러운 노인네, 부유했는지 가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모만 놓고 보면 스크루지의 시현이라고 할 만하다. 인류의 최후라니 크게 웃을 일은 아니겠지만 기쁨 하나 없는 천국행이라니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 최후의 심판과 다를 게 없다. 돈과 일에 허덕이는 삶, 오늘 쉬면 내일을, 지금 쉬면 노년을 걱정해야 하는 생활,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행복하지 않은 세태. 여기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콘스탄틴>에서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욕조 혹은 세숫대야 정도의 물만이 필요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지옥에 당도할 수 있다. 귀신과 악마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영화의 묘사가 은유가 아니라 명징하게 새겨진 철칙 같다.




시스티나 성당 출구로 나오면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는 지름길로 연결해 준다. 과거에는 개인 관람자도 이 지름길로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언젠가부터는 투어를 통한 단체 관람자만 통과시켜 준다고 한다. 만약 바티칸 박물관을 보지 않고 베드로 대성당만 관람하고 싶다면, 베드로 광장을 빙 도는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한다. 체력과 시간의 효율성을 따지는 여행자라면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통해 베드로 대성당에 입장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은 공식적으로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가장 큰 로마기독교 교회당이다. 이는 교황청 법령에 따른 규칙이다. 베드로 대성당은 쉴 새 없는 압도의 연속이다. 거대한 크기에 한 번, 장엄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숨 막히는 예술작품들의 향연에 한 번, 그 작품들이 모작이 아닌 진품이라는 사실에 한 번씩 놀란다. 성당의 그림들의 모자이크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의 분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하게 된다. <피에타>가 보인다. 23세의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성모마리아가 슬픔을 승화하고 정신적 성숙과 해탈에 이르렀을 것으로 해석하여, 부드럽게 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으로 창작했다. 아들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냐는 비난에 대하여 미켈란젤로는 답했다.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늙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라는 인간은 여자라는 존재와 대화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싶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공중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지 않고 잠자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역시나 <피에타> 역시 하찮은 지상의 인간이 아니라 공중의 하느님을 위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지상에서 높이 있거나 멀리 있는 조각상을 보기에 충분히 크게 보이기 위해서인지 실제 인체보다 약간 크게 작업했다. 지금처럼 미친 인간을 피해 조각상을 멀리 유리관 안에 넣어둘 것을 예측이라도 했나. 미켈란젤로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조각상은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옷을 털며 일어나 움직일 듯하다. 바티칸의 <피에타>나 피렌체의 <다비드>나, 미켈란젤로의 조각 특기는 긴장과 이완 사이의 팽팽한 정중동이다. 가만히 있는 자세에서도 용수철 같은 탄력을 느낀다. 임무를 완수한 그리스도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성모의 편안한 표정. 두 존재의 표정과 자세는 천상의 것인 듯 하지만, 피부와 골격은 지상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 치밀하고 정확하다. 가볍게 눌린 살, 팔꿈치와 무릎, 손등과 발등의 모세혈관.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구상의 참신함뿐만 아니라 묘사의 치밀함에서도 발현된다. 가까이서 보면 유혹되고 멀리서 보면 향수를 느낀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된 아들과 죽은 아들을 보듬어 안음으로써 인간 전체를 품는 어머니가 고통이라는 구덩이 안에 뭉뚱그려지면서도, 슬픔을 극복한 평온한 분위기를 통해 보는 사람에게 묘한 안도감을 준다. 생로병사, 희로애락, 새옹지마.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고어는 왜 하나같이 고통과 기쁨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인가. 짜증 나는 인간 존재의 숙명이다. 

'피에타'는 죽을 때까지 미켈란젤로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였으며, 밀라노 스포르체스코성에는 팔순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또 다른 <론다니니 피에타>가 있다. 청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혈기왕성하고 작가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품이라면, 팔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주물러놓은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지만 인생을 관조하는 노쇠한 작가의 심오한 원숙미가 느껴진다.




왼쪽 복도를 따라 도착한 <성 베드로 청동상>의 앞으로 나온 오른쪽 발가락에 입을 맞춘다.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는다는 기복신앙은 우리네 서낭당이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실제가 아니면 어떠랴 만질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기념인데. 본당 정중앙에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발다키노가 위용을 자랑하며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천개를 만들기 위해 판테온 천장을 장식하던 청동을 뜯어왔다는 잔혹한 사실을 아는 순간에도 감탄할 사람이 있을까 싶다. 판테온보다 천개가 엄청나게 더 대단한 미술적,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도 아니지 않은가. 

인간의 폭력성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는다. 하나의 건축물도 어떻게 보면 완성된 개체인데 그것을 찢어발겨 부품을 떼어내 또 다른 곳에 붙이려는 사고방식은 폭력적이고 불쾌감을 준다. <토이스토리>에서도 해골 옷을 입은 악동 어린이가 장난감들을 해체하여 재조립한다. 본연과 순리에 어긋난다. 본연과 순리라는 것도 최초에 인간이 부여한 것일 수 있지만, 어쨌든 처음에 이렇게 하고자 한 것을 마땅한 사유도 없이 갑자기 저렇게 하자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 욕심으로 인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달리고 헤엄쳐야 사는 동물들을 닷 평 감옥에 가두게 된 것 아닌가. 어쨌든 판테온은 감각 없는 무생물인데, 내가 과도한 감정 몰입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본당 관람을 마치고 쿠폴라(돔, cupola)에 올라가기로 했다. 층은 5개 층, 계단은 5백 계단이 넘는데, 5층까지 걸어 올라가면 5유로, 엘리베이터로 3층에 내려서 2층만 걸어가는 것은 7유로이다. 자본주의는 치사하다. 하지만 2유로보다는 무릎이 소중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단에 당도해서 걸어 올라간다. 계단은 쿠폴라의 경사진 안쪽 벽면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폭은 좁고 천장은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다. 몸은 자연스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오른쪽 벽면을 짚어가며 올라간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 가쁘게 올라가다가 성당 옥상에 당도하면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며 해방의 기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평선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붉은 지붕과 녹지의 향연이다. 그 가운데 명확한 열쇠 모양의 베드로 광장이 콕 박혀 있는 장관을 보면 없던 신앙심도 생기겠다. 옥상 복도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그런 공간에 관람객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좋은 구경 한 번 하라고 1루석 자리를 양보해 줄리는 만무하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인간 벽을 뚫고 베드로 광장이 잘 보이는 자리를 탈취했다. 어글리코리안이 되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 몰아가는 것이다. 열쇠 같은 베드로 광장을 보며 오늘의 죄를 고백했다. 저 밑 성당 옥상의 열두 제자 동상이 베드로 광장과 로마 시내를 굽어살피는 듯했다.

이전 05화 인생은 라파엘로처럼, 수명은 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