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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역사는 선형인가 환형인가

DAY 3 바티칸 시국 투어

어제는 남부투어를 떠났다가 자정이 다 돼서야 민박집에 복귀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바티칸 투어가 있다. 8시에 바티칸시국에 가까운 지하철역 치프로(Cipro/Musei Vaticani)에서 투어에 합류했다. 지하철역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역시 박물관 견학에 8시는 너무 이른 시각이다, 고 생각했던 것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앞선 팀은 바티칸 장벽에서 9시 개관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광기는 한겨울 바티칸의 성벽을 달군다. 우리 팀도 약 50분간 장벽에서 대기하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바티칸은 엄밀히 말하면 '바티카누스 언덕'이라는 지역을 칭하는 지명일 뿐이고 공식적인 국가명은 '성좌' (Sancta Sedes, the Holy See)로서, 국교는 가톨릭, 수장은 가톨릭 교황이다. 바티칸의 위치는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라는 것으로 유명하고, 실제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대천개, 大天蓋, Baldacchino) 밑에 베드로의 실제 처형 장소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 뼈를 발견했단다. 사실일까. 2천 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의 뼈를 발견하고 그 뼈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기독교 교인들은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신앙은 믿음의 영역이라 과학과 이성을 적용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끊임없이 고대의 유골과 유적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또 그 성과를 자축하는 것은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과학을 적용하는 것 아닌가. 유물은 모든 종류의 과학과 공학과 인문학이 통섭하는 현대의 검증을 견뎌낸 것인가. 과연 신뢰성이 있는가. 혹은 그 신뢰성을 묻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개찰구를 통과해서 가장 먼저 피나코테카(회화관, Pinacoteca)에 이르렀다. 유수 천재들의 유수의 명작들.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과연 보편적인 미의 기준일까, 유행의 요행일까, 작품을 탄생시킨 역사나 배경일까. 전문가들은 수십억 명의 사람과 수십억 개의 눈이 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감상하지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좋게 감상하면 된다고 하지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작품보다 더 좋은 비평, 더 비싼 값을 받는 작품이 있다고 하면 어쩐지 시무룩해지기 마련이다. 난해한 현대미술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현실과 느끼는 대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하는 전문가의 격려를 조합해 보면 '어디 그런 저렴한 미적 감각으로 우리 미술 장르에 범접하느냐.'라는 결론이 난다. 젠장. 역시 미술은 교과서대로 봐야겠다.

귀도 레니의 그림은 포근하다. <성 마태오와 천사>에서 천사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수태고지' 작품들에서는 성모마리아에게 그리스도 잉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이 위엄 있고 장엄한 모습으로 지엄한 신명을 전하는 데 반해, 귀도 레니의 <성 마태오와 천사>에서 늙은 마태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는 영유아의 모습이다.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만지작만지작거리고 작은 입으로는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소재를 모르고 보면 여느 할아버지와 손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벽을 뚫고 저술을 하는 할아비와 그 옆에서 무언가를 조르는 손자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검고 깊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그림 하단에 석관이 있어 그리스도를 매장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상황이다. 입체적인 석관은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처럼 날카롭고, 인물들은 혁신적이고 도전적으로 관객들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의식을 훔쳐보는 우리를 경계하는 듯 말이다. 축 늘어진 그리스도의 손가락은 때와 먼지로 지저분하다. 그리스도를 내리는 사람들은 흡사 왕초가 이끄는 거지 집단이라 해도 믿을 정도이다. 그중 초췌하고 볼품없는 할머니가 성모마리아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를 두고 일상에서 접하는 필부필부의 모습을 모델로 삼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최초로 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체를 더럽게 묘사한 것을 두고 심하게 비난했다. 늙은 성모마리아, 더러운 그리스도의 성체, 인간의 모습을 한 성모자(聖母子)를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여러 번의 폭행, 살인으로 투옥된 적이 있으며, 결국 언제 죽었는지 확인도 되지 않고 해안가에 떠내려 온 시체를 보고 사망한 것을 알았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작가의 일생은 작품에 반영된다. 거친 삶은 대담한 화풍이나 문체로, 안온한 삶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나타난다. 폭풍 속에서 돛대에 몸을 묶고 바다를 그린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질풍노도와 같고, 일상과 머물던 마을의 풍경을 사랑하던 존 컨스터블의 그림은 다분히 목가적이다. 수많은 유명인사와 친분을 과시했던 구스타브 클림트는 관객을 응시하는 듯 인물의 도도하고 도발적인 모습을 그렸고, 여성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간과 친분이 없었던 에드가르 드가의 작품들에서 여성들은 등을 지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전쟁 같은 삶을 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글은 '하드보일드'이다. 작품과 그 배경을 굳이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작가의 일생을 상상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감상의 주요한 재미이다. 

그 와중에 곱고 유려한 작품의 이면에서 고통스러운 생애와 불우한 시대를 이겨낸 작가를 발견하는 것은 실로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암 수술을 받고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굽어서도, 단순하고 천진난만하게 행복감을 주는 종이 오리기로 그림을 창작한 앙리 마티스가 있다. 공산주의 혁명과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을 다니면서도 찬란하고 신비로운 색채로 시골마을과 어여쁜 커플, 신의 이야기를 그린 샤갈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쓴 윤동주도 있다.




회화관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가이드 말씀도 그렇고 인터넷 후기도 그렇고 바티칸 박물관의 카페테리아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음식의 맛, 가성비 등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들은 도시락 싸가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하지만 가이드께서는 한 마디 수수께끼를 남기셨다. '일생에 단 한 번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 지구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에서, 기필코 기억에 남을만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또한 얼마나 값어치 있는 식사가 될까요.' 나는 기꺼이 그 기회를 선택하였다. 7.5유로를 내기에는 아까운, 보잘것없는 소시지가 퍽퍽하고 푸석거리는 빵에 대충 끼워진 핫도그 세트를 먹으며 그래도 플라스틱 모형처럼 생긴 햄버거 세트(8.5유로)는 안 시켜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점심을 먹고 짬을 이용해서 바티칸 관람의 별미인 '성소에서 나에게 엽서 보내기' 시간을 갖는다. 카페테리아 근처에 바티칸 시국 우체국이 있다. 이곳에서 해외로 우편을 발송할 수 있다.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뽐내는 0.9유로짜리 엽서를 고르고, 눈물을 훔치며 모나미 253보다 좋지 않은 3.98유로짜리 펜을 사서 나 자신에게 '너를 믿어. 앞으로의 너를 응원할게. 파이팅.'이라는 등 시답잖은 편지를 썼다. 해외우편을 담당하는 가운데 창구로 가서 2유로짜리 우표를 사고 침을 발라 엽서에 붙여 우체통에 넣으면서 인증숏을 남긴다. 엽서가 바티칸의 영험한 기운을 싣고 집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투어 팀이 다시 집결해서 관람을 계속했다. 거대한 솔방울 동상이 있는 솔방울 정원을 지나 벨베데레 정원에 이른다. 남성미의 기준인 <벨베데레의 아폴론>의 상체 대 하체 길이 비율은 황금비율인 1 대 1.618이다. 현대의 우락부락한 남성미를 기준으로 볼 때 근육이 조금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의 체형을 생각해 볼 때 소년미의 효시라고 할 만도 하다. <벨베데레의 아폴론>을 언급할 때 같이 등장하는 것이 <밀로의 비너스>이고, 무산되기는 했으나 나폴레옹도 두 조각상을 같은 곳에 전시해 두고 싶어 했지만, 막상 두 조각을 같이 떠올리면 위화감이 든다. <벨베데레의 아폴론>은 소년미를 풍기는 데 비해, <밀로의 비너스>는 농밀한 요염함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소년과 숙녀의 조합이라, 어쩐지 숙녀를 말리고 싶은 조합이다.

한때 근육질의 마초 같은 남자를 멋있게 보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요새 아이돌 문화에서는 유연하고 중성적인 스타일이 주요한 매력 포인트로 부각된다. 야리야리한 몸매에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미소년들이 큰 인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미소년에 대한 예찬이 넘쳤고, 신라시대에도 소년 군사단체를 '꽃다운 사내(화랑)'라고 부르는 등 과거에도 소년들에게서 심미적인 매력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보면 역사는 과연 선형이 아니라 환형 내지는 스프링 같은 모양이 아닐까 싶다. 혹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수립한 미적 기준이 꽤 일관된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것보다는 매끈한 것, 짧고 굵은 것보다는 길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능인가 싶다.




아폴론 옆에는 <라오콘 군상>이 있다. 트로이 전쟁 중 신의 미움을 산 사제 라오콘이 두 아들과 함께 물뱀에 휘감겨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죽게 되는 생생한 현장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깊이 공감하는 편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고통스럽게 죽는 꼴을 상상할라치면 몸에 기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가끔 어떤 사건의 사상자 기사를 접할 때가 그렇다. 무심하게 활자로 써진 사상자이지만, 한 명 한 명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손발에서 힘이 빠지고 피가 멈추는 느낌이 든다. 배의 침몰, 사고 난 자동차의 폭발, 건물의 붕괴, 군대의 가혹행위. 기사에서 묘사한 시간대별 정황을 하나씩 읽으면서 그 상황에 몰입하다 보면 얼마간은 극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멍해질 때가 많다. 때로는 부러 그러한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한다. 죽음이 나에게 스며드는 것 같아서 힘이 빠지는 것일까. 생물의 본능에서 비롯한 거부감 때문일까.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기가 온다고 하는데 언제쯤인 궁금하다. 죽기 싫거나 두렵지는 않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두려운 것 같다.

벨베데레 정원을 통과하면 피오 클레멘티노 조각전시관에 들어선다. 이곳 뮤즈의 방 정중앙에 <벨베데레의 토르소>가 위용을 자랑하고, 관람객들은 그의 앞뒤 양옆을 둘러싸고 몸매를 관람한다. 사실 몸매랄 것은 없다. 조각상은 목, 팔, 다리에서 잘려서 '토르소'의 뜻 그대로 몸통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고작 남아있는 그 몸통이 모든 신체를 다 담고 있다. 몸통 자체의 균형이나 근육의 조화는 말할 것 없이 아름답고, 잃어버린 팔과 다리가 마치 붙어있듯이 그려진다. 묵직한 돌덩어리가 신화 속 인물처럼 섬세한 상상을 자극한다. 과거에는 모델이 헤라클레스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근래에는 양 떼를 적군으로 착각하고 몰살시킨 그리스의 아이아스 텔라모니오스 장군일 것이라 한다. 과오를 저지른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고민하는 순간을 담았단다. 실수 때문에 자살을 고민한다는 단순한 요약은 이해 불가하니, 알려지지 않은 복잡다단한 뒷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라오콘 군상>이나 <벨베데레의 토르소>나, 기술의 수준과 구도, 균형미, 세부묘사 면에서 현대의 어느 작품에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다. 저 위대한 <피에타>에 비교해도 <라오콘 군상>의 못한 점이 절대 없는 것 같다. 물론 이는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다. 현대 기술로도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만큼 조각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한다.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당초 고대의 도료로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발굴할 때 색깔이 모두 퇴색되어 버렸고 복구하는 방법을 몰라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한다. 우주선을 만들고 인공지능을 키우는 기술을 제외하고, 지금 인류의 능력이 과거보다 더 나은 것이 있기는 할까. 문학성과 예술성은 감성의 영역이라 우열을 가리기가 불가능하다 해도, 창작하고 묘사하는 기술조차 현대가 과거보다 발전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다시 생각하지만 역시 역사는 선형이 아니라 환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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