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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몸은 지하에 마음은 천국에

DAY 4 로마 버스 투어

로마 시내를 벗어나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Catacombe di St. Callisto)에 당도했다. 카타콤베는 로마 주변에 약 60여 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아피아 가도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 셋테키에세 거리의 도미틸라 카타콤베와 이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가 가장 유명하다. '카타콤베'는 고대 로마어로 드러눕는다는 뜻의 '쿠바레'와 무덤이라는 뜻의 '콤베'의 합성어라고 한다. 애초에 카타콤베라 하면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를 일컬었고, 다른 카타콤베는 공동묘지이자 안식처를 뜻하는 치미테로(cimitero)라 했다가 후대에 모두 카타콤베로 바꾸어 불렀다.





고대 로마에서는 사후세계라는 것이 없어서 시신을 화장했는데 이 땔감이 너무 비싸서 사실상 부유층만이 화장을 할 수 있었다. 돈 없는 서민들은 매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로마는 성벽 안에 묘지를 허용하지 않아 성벽 밖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매장 문화는 기독교인들과 잘 어울렸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돈이 없던 서민이나 노예계층이어서 화장이 어려웠던 점, 그리스도가 실제로 아마 천 담요에 싸여 바위 속 굴에 매장되었다는 점, 내세를 믿기 때문에 시신의 형체를 바꾸는 것에 꺼림칙했던 점 등 때문이다.

기독교 세력의 확장과 교인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매장공간은 점차 부족하게 되었고, 결국 지하로 지하로 더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로마 주변 응회암 토질은 젖어 있을 때는 손으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무르지만 공기에 노출되면 점점 경화되는 성질이라 무덤을 만들기에 좋았고, 사람들은 깊숙이 깊숙이 땅을 파고 구멍을 내 시신을 묻게 되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시신이 묻힌 곳이 성스럽고 침입할 수 없는 성소(sanctuary)였기에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들은 점점 더 묘지 주변에 지하 미궁을 만들고 피신하기 시작했다. 로마 대화재 이후 대규모 기독교 박해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가 순교했다. 비오크라테우스 황제 시기에는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화살을 맞고 순교했다. 이들 죽은 성인은 카타콤베에 매장되었고, 산 기독교인은 카타콤베 근처에 살았다. 폴리도리에 의하면 지하 묘지들의 총 연장길이는 대량 900킬로미터였고, 3백 년의 세월 동안 무려 6백만 명이 매장되었다고 한다. 카타콤베는 '죽은 자들의 도시(네크로폴리스, necropolis)'였다. 보통사람은 무서워 가지 않았고 병사들도 굳이 쫓지 않았다. 카타콤베는 사실상 공개된 안가였다.

사실 카타콤베 내부는 공기가 희박하고 너무 건조하여 대규모 인원이 거주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기독교 신자들도 사실 하루 이틀 긴급하게 대피할 때만 사용했을 수 있다. 지하 갱도는 횃불을 들기에 너무 좁아 호롱불만 들 수 있었다. 신자들은 길을 외우고 있었으니 어려움이 없었지만, 혹여라도 체포하러 들어온 병사가 깊은 미로 속에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극적으로 구출되어서 개종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콘스탄티

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기독교인들도 지상으로 나와 따뜻한 햇볕을 마주했고, 지하 공동묘지는 교회 재산이 되어 바티칸 관할의 여러 수도회로 배분되었다. 다만 기독교 공인 후에도 카타콤베는 수난과 약탈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원래 로마인들은 무덤에 고인이 평소 지니던 귀한 물건도 같이 넣어주는 장례 풍습이 있었는데, 빈번한 이민족의 침입으로 카타콤베 내부의 귀중한 자료와 보석 등이 훼손되고 도난당했다. 로마 멸망 이후 거의 다 도굴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어떤 지하 묘지에 가봐도 관 뚜껑이 남아 있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민족의 침입 등쌀을 못 이기고 기독교인들은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과 순례자들의 유골, 유물을 성 안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유물이 대부분 이전된 이후, 기독교인들도 더 이상 카타콤베를 찾지 않았고 카타콤베는 현대에 발굴될 때까지 역사에서 점점 잊혀 갔다. 




카타콤베에 매장하는 방식은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벽감에 시신을 안치하고 부장품을 채우고 석판으로 벽을 메우는 식이었다. 석판에는 이름, 순교일자, 묘비명을 썼다. 그나마 부유한 사람들은 대리석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일반 기왓장으로 석판을 삼았는데, 석판 수요가 늘어나가 석판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생겨났고 이 중 상표를 찍어내는 공장이 생겼다. 이 상표는 스타벅스 로고와 비슷한 원형 스탬프인데,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출구 쪽에서 이 상표 스탬프를 볼 수 있다. 시신을 안치한 일부 석관 모서리에는 맹수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많은 수가 도굴되어 건물 장식으로 쓰였고, 석관 자체도 로마 귀족들이 가져다가 수조, 화분, 화단 등으로 활용했다. 땅 파다가 우연히 나온 도자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했던 경주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가족과 함께 최후의 심판의 날을 맞기 위해 아치형의 단란한 가족방을 만들었고, 영유아 시신들을 위해 아기묘도 만들었다.

각 매장 칸 옆에 기독교인을 암시하는 암호를 새겨 넣었다. 양을 짊어진 착한 목자, X자와 P자를 겹쳐 쓰고 '크리스토스'라고 읽는 '그리스도', 신앙을 표현하는 닻, 처음과 끝을 상징하는 '알파'와 '오메가', 비둘기, '익투스(고대어 약자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와 발음이 비슷한 '물고기',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인파체' 등이다. 때로는 벽화로 성화도 그렸는데, 예를 들어 선지자 요나나 이사야를 그리기도 하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 하여 물결선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5세기까지 우상숭배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는데, 6, 7세기부터는 그리스도의 얼굴도 그렸다. 카타콤베에서 발굴되는 석관, 성유담, 금채색의 유리메달도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특히 벽화는 도상학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최초에는 미적인 대상으로 과실수, 그리스 신화, 동물, 풍경 등을 묘사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의 상징인 선학 목자, 사도, 성인, 성서의 설화 등이 소재로 등장한다. 마치 어린아이일 때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것만 이해하다가 지능이 자랄수록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 성녀 체칠리아는 순교하면서 본인 명문 집안의 토지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교황 제피리우스는 부제 칼리스토에게 묘지 관리를 맡겼는데, 칼리스토는 차기 교황이 되었고 그 자신이 이 카타콤베에 묻혀 그 이후로 칼리스토 카타콤베가 되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3세기 때부터 기독교 공식 묘지로 지정되어 폰티아누스, 파비아누스, 식스투스 2세 등 초기 교황 13명이 모두 묻혔다. 현재 폰티아누스를 제외한 모든 교황의 시신은 베드로 대성당 지하로 이전되었다. 성녀 체칠리아의 모습은 현재 칼리스토 카타콤베 한 칸에 남아있다. 당국은 체칠리아를 뜨거운 욕탕에 넣어 사형시키려고 했는데, 증기 속에서도 죽지 않자 참수되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성가를 불렀다고 하여 음악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체칠리아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도록 왼손가락 3개를 붙이고 오른손을 땅을 가리키며, 옆으로 뉘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매장되었다. 1500여 년 후 체칠리아의 시신을 발굴했을 때, 그녀의 시신은 썩지 않고 깨끗했다고 한다.




아쿠아 클라우디아 수도교를 경유하여 트레폰타네 성 바오로(St. Paulus alle Tre Fontane) 성당으로 향한다. 사도 바오로가 참수당한 이후, 성당이 건립된 곳이다.

네로 치하 로마에서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전차경기장 옆 처형장에서는 낮에는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밤에는 화형을 집행하여 전차경기장 불을 밝혔을 정도였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다신교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 지독한 증오를 받았다. 

원래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뿌리가 같고 교리가 비슷하다. 태초에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 선민 아브라함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본처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고,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셔서 일흔이 되던 해 후처로부터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이후 100세가 되던 해 본처로부터 아들 이삭을 얻었다. 물과 음식이 부족한 땅 광야에서 형과 동생은 사이좋은 관계로 남을 수 없으며, 유목민의 풍습에 따라 장자 이스마엘은 양식을 받아 먼 곳으로 떠나게 된다. 장자 이스마엘의 후손이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고, 차남 이삭의 후손이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뿌리로부터 내려온 두 갈래 민족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면서, 평화와 갈등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이제 그만 싸움을 멈추고 사이좋게 지내보면 어떻겠냐는 주장을 했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두 민족이 있던 세상에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도 좀 같이 천국 좀 들어가자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자 메시아이다. 이는 유대인들과 정면충돌한다. 유대인들은 정통성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다. 아직 세상에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메시아가 온다면 최후의 날 유대인들만 구원받기로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란 놈이 전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니 처음엔 미친놈 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점점 그 커지는 세력에 미울 수밖에 없다. 또 유대인들은 특유의 성실근면함으로 원래 로마에서 부와 권세를 거머쥐고 있었다. 많은 공무원도 배출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도 만만치 않게 성실한 데다, 공동체와 화합을 중요시한다. 다신교 주의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그저 고집 센 정신병자들이었던 반면,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밥그릇 뺏으러 달려드는 좀비들이었다. 대결 상대를 맞닥뜨리자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탄압한다. 유대인 바리사이파 사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울은 서남아프리카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발달된 중계무역도시였으며, 사울은 이법, 율법에 밝았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속지에서 태어났으나 엄연한 로마 시민이었으며, 수준 높은 그리스 문화를 접하고, 고명한 유대교 율법학자 가믈리엘의 제자로서 교육받아왔다. 성인이 된 사울은 로마의 공무원이 되어 정통 바리사이파로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러 다마스쿠스로 진압에 나선다. 

사울은 여정 길에 갑자기 나타난 큰 빛에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경험에 자신이 점지받았다는 사실을 완강히 부정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나타난 그리스도의 현시를 경험하고 3일간 실명 상태가 되었다가 결국 소명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기독교 진압을 위한 여정을 틀어 역으로 기독교 전도를 위해 3회에 걸쳐 여행을 한다. 어제까지는 기독교를 쫓는 관리였으나, 오늘부터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사울은 로마에까지 그 발자취를 남기고 수많은 소수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훗날 사도 베드로에 버금가는 사도, 양대사도, 맞사도가 되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의 사도명은 바오로이다.




사도 바오로는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옥에 갇히는 등 많은 시련과 난관이 있었으나,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을 다 했으며, 그가 어렸을 때 익힌 학식은 전도에서 더욱 빛을 발하여 초기 기독교의 기반을 닦았다. 로마, 고린토, 갈라디아, 에페소, 필립비, 골로사이, 데살로니카, 히브리 등 전도한 지역의 사람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디모데오, 디도, 필레몬 등에게 신앙의 조언과 충고를 담은 편지가 13통의 서간으로 신약성서의 일부를 이룬다. 사도 바오로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명석한 신학자였고, 가장 열렬한 전도자였으며, 기독교가 세계에 전파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개국공신이다.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잡았고, 성서의 기반을 닦아 후세에 끼친 영향을 헤아릴 수가 없다. <왕국>(엠마뉘엘 카렐)은 평범한 아재 같지만 정열적이고 계획적으로 해야 할 일을 걱실걱실해나가는 바오로의 모습을 그려 기독교가 바오로에게 진 빚을 보여준다. 기독교가 오늘날에 이르는 전파력과 장악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열두 사도를 포함한 초기 기독교 성인 그 누구보다도 바오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자기 객관화와 주제 전달력이 뛰어났다. 그는 참회와 개종을 통해 교인이 된 자신의 약점과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바오로의 서신 속에서 전개된 그의 사상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닮아야 할 우리 인간이 우선 죄지은 인간으로서 죽었다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였고, 회개를 통한 신앙을 몸소 보여주었다.




사도 바오로는 네로 치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십자가형을 받은 그리스도나 베드로와는 달리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죽기 직전까지 당당하게 지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했기 때문에 담당하게 죽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참수될 때 떨어진 목이 3번 튕겼으며, 튕긴 자리마다 샘이 솟았다고 한다. 이곳이 3개의 샘의 성당, '트라폰타네'이다. 

오늘날 트라폰타네 성 바오로 성당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관할이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맥주가 유명한데, 그 역사가 싶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터라 중세시대부터 금식기도를 실시했다. 해가 지면 유동식을 섭취하는데, 빵을 물에 담가 흐물흐물해지면 먹는 방법을 고안했다. 여름에는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해 빵을 담가 놓은 물이 발효되며 에일맥주가 생성되었다. 알코올이 평균 4, 5도인 라거맥주와 달리 에일맥주는 평균 9, 10도로 강하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벨기에, 독일 등 전 세계 8곳에서만 브랜드를 붙이고 판매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병에 만원이 넘는 금액이지만 이곳 성 바오로 성당에서는 약 3, 4유로 정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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