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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돌고 도는 마르세유턴

DAY 14 마르세유 아를 관광

이른 아침, 기차역으로 갔다. 날이 흐리다. 마르세유에 온 김에 아를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를행 편도 기차표에 15.3유로를 내고, 기차역 카페 '필레아스(Phileas)'에서 크라상, 쇼송과 물을 사고 5.35유로를 냈다. 쇼송 안에 사과잼이 들어있는데 한국이나 영국에서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었다. 한국인이 김치를 잘 만들듯이 프랑스인들은 잼을 잘 만드나 보다. 복숭아잼 든 것도 있는 것 같았는데 못 먹은 게 아쉽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필레아스 포그는 영국인이고 세계일주도 출발도 런던에서 한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프랑스인 하인 이름이 장 파스파르투인데, 이 '프랑스 기차역'은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의 '프랑스인' 이름을 굳이 빼고, '영국 기차역'에서 출발하는 '영국인' 이름을 가져다 썼다. 호텔 이름은 또 어떤가. 옛날엔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르세유가 프랑스 열차의 종착역이 아닐 텐데 자랑스럽게 '종점(Terminus)'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창의력과 근거 없는 자부심은 모로 보나 존경스럽다.




9시 30분경 아를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동절기에 여행 왔으니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번 여행은 날씨 운이 지지리도 없다. 간단하게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와 반 고흐의 카페(Cafe Van Gogh)만 보려고 했는데,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원형경기장과 반원극장을 발견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도시 성벽을 허물고 2만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미니 콜로세움인 셈이다. 6세기 서고트족의 침입 전까지는 검투경기를 개최했으나, 야만족들이 휩쓸고 간 이후 민간인들이 여기서 거주를 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세월이 흘려 19세기가 되어서야 고대의 모습을 되찾는 복원을 하였고, 이후 연례행사로 4월, 7월, 9월에 투우경기를 개최한단다. 스페인 투우 경기는 마타도르와 소의 결투라 소를 죽여야 끝나지만, 이곳 남프랑스의 투우는 소의 머리에 리본을 묶으면 된단다.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 경기인가. 그래도 소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 원형경기장은 고흐도 즐겨 찾았는지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경기장 자체는 구석에 조그맣게 그려놓고 대부분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로 채워 넣었는데, 오늘날 야구경기를 보러 갔을 때의 장면과 비슷한 구도이다.

시청사와 성 트로핌(St Trophime) 성당이 있는 레푸블리크 광장을 지나 대로로 나오니 관광안내센터가 있어서 지도를 가져와서 다시 에스파스 반 고흐와 반 고흐 카페를 찾아갔다. 두 곳 다 그림으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겨울인 데다가 비까지 와서 그랬겠지만, 명화를 상상하면서 부푼 기대감을 안고 대상지에 도착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특히 고흐같이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화가가 보는 세상과 나 같은 범인이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에스파스 반 고흐의 경우 현재는 전시관과 도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지마는, 과거 병원의 이력 때문인지 스산한 느낌이 지배하고 있다. 4면이 건물로 둘러져, 중정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교도소 운동장을 연상시키는 정원. 잘 정돈되어 있는 나무와 풀은 환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계산적인 모양인 듯 기이하다. 내력을 모르고 방문한다면 아담하고 쉬기 좋은 정원일 듯 하지만, 나로서는 어쩐지 꺼림칙한 공간이다.

에스파스 반 고흐에서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고흐의 색감이 나오지 않자, '고흐가 진짜 미쳤었나, 어떻게 그런 색으로 세상을 보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되돌아 나오게 되었다. '카페 반 고흐'의 경우는 카페 자체도 사진에 잘 나오지 않을뿐더러, 색도 고흐의 그림과 확연히 달라서 방문한 의의가 없어져 버렸다. 고흐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데는 의의가 있었지만, 그가 보았던 풍경을 나도 보리라는 기대는 오만이었다. 겨울이 아니라 반드시 여름에 왔어야 했나. 차라리 방문하지 말고 상상으로만 남겨 두었어야 했나. 

다만, 레푸블리크 광장에서 대로로 나가는 골목에 있는 어느 슈퍼에서 산 라즈베리머핀(2유로)과 동네슈퍼에서 산 우유(0.83유로)는 인생머핀과 인생우유였다. 고소함 그 잡채인 우유는 불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지방비율이 한 5퍼센트는 되는 것 같았다. 영국에 돌아와서 라즈베리머핀 생각에 사 먹어 봤지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1시 50분 다시 기차를 타고(17.5유로) 마르세유로 복귀했다. 날씨가 화창하다. 마치 아를과 마르세유 간 비행기를 타고 오간 것처럼 두 도시의 날씨가 판이하게 달랐다. 일일권(5유로)을 끊고 지하철을 탔다. 졸리에테(Joliette) 역에서 내려서 생 마리 마죄르(Sainte Marie Majeure) 성당을 보러 갔다. 피렌체 산조반니 세례당과 비슷하게 외벽 전체에 녹색 가로 줄무늬가 들어간 로마네스크 성당이었다.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같은 하늘색 반구형 돔 모자를 쓴 줄무늬 성당이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오뚝 선 것이 너무 귀여웠다. 내부는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재된 인테리어였다. 외벽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내벽에 반짝이는 금색 모자이크 벽화가 더해졌는데 여성스럽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외벽은 초록 줄무늬, 내벽은 빨간 줄무늬가 아기자기 예쁘고 유아복 같다.

구항구(Vieux Port)를 거쳐 노트르담 드 라 갸흐드(Notre Dame de la Garde) 성당에 갔다. '보호인 성모마리아'라는 의미로, 항구도시인만큼 선원들을 수호해 달라고 지었나 보다. 높이 154미터 되는 산 꼭대기에 있는데,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걸어가기에는 무리라서 60번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언덕길에서 마르세유 전경이 보인다. 니스도 그렇고 마르세유도 그렇고 프랑스는 대중교통 코스가 전망대이다. 날씨 때문에 대부분 실망인 프랑스 여행에서 얻은 유일한 보너스는 이것이다. 

원래는 근처에 13세기에 지어진 예배당이 있었는데 순례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9세기에 새로 대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1층의 성당박물관, 매점부터, 7층 성당 본당까지 높이가 상당히 높다. 해발로 보면 거의 200미터 가까이 될 것 같다. 성당 맨 꼭대기의 황금모자상이 짙게 낀 구름에 대비되어 노랗게 빛난다. 5층 테라스는 마르세유 전경을 관람할 수 있는 360도 전망대다. 바다부터 내륙까지 시원하게 전경을 관람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발코니 난간에는 안치된 사망자들의 성함을 적은 명패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아마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공동묘지일 듯하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배 모형과 파도 그림 등 온통 바다 내음이 난다. 예로부터 어업이 발달한 도시인만큼 배를 타고 나간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천장에 배 모형을 매달아 놓고 기도를 한다. 궁륭은 황금색으로 된 돔들이 열을 지어 이어지고, 중간중간 아치는 흰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들어간 대리석이다. 아치 사이사이를 바다를 상징하는 듯 파란 바탕에 원무늬가 들어간 장식이 메꾸고 있다. 제단의 성모자상 위쪽 돔에는 바닷사람들의 성당임을 말하듯이 바다를 항해하는 배 그림이 문장처럼 그려져 있다. 천장 돔에는 4명의 천사들이 원반을 떠받들고 있는데, 원반 가운데 문양이 활 모양인 것 같기도 하고 돛 모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림체가 알폰소 무하 같이 선남선녀들이다. 본당과 지하무덤에는 묘비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명복을 비는 촛불컵들이 옹기종기 켜져 있다




노트르담 드 라 갸흐드 성당 앞에서 다시 60번 버스를 타고 구항구로 내려와 '오스카(Oscar)'라는 베이글카페에서 햄치즈베이글과 카페라테(7.45유로)를 먹었다. 그냥 베이글에 햄, 치즈, 상추 넣고 크림치즈 바른 건데 아주 맛있다고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베이글이랑 상추도 좀 작고 너무 밋밋했다. 항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롱샹(Longchamp) 궁전으로 이동했다. 롱샹궁전은 학익진형태로 된 회랑형 궁전으로 분수가 나오는 연못을 감싸고 있다. 5시가 막 넘었는데 5시 15분에 문을 닫는다고 하여 많이 못 보고 나왔다.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겉에서 회랑과 분수만 봤는데 화려하고 과장된 장식이 눈에 띄었다.

19세기 항구도시로서 마르세유가 번성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물이 부족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안으로 인근 엑상프로방스의 듀랑스 강물을 마르세유로 끌어오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롱샹궁전을 건립했다. 건립 이후 마르세유 시립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입주하였고, 현재는 없지만 한 때는 동물원도 있었다. 마르세유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프랑스 제국의 세력 확장이 가속화될 때, 식민지에서 끌고 온 신기한 생물, 무생물들이 도시로 밀물처럼 유입되면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건설한 일종의 과시형 전시물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마르세유는 나라 최고의 이민자 비율을 구가하는 도시였을 테니, 원주민에게나 이민자에게나 위대한 프랑스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흥망성쇠는 인류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그렇게 흥성하던 공원이 이제는 을씨년스러운 껍데기만 남았다. 화무십일홍이라 필 때는 아름답고 거창하지만 질 때는 누구나 다 소리 없고 쇠약하다. 구조적 아름다움은 여전하겠으나, 사람은 주관의 동물이라 배경지식이 합쳐지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트램을 타고 구항구로 돌아와 82번 버스를 타고 생니콜라(St Nicolas) 요새에 먼저 갔다가, 생장(St Jean) 요새에 갔다. 도시 북쪽의 생니콜라 요새와 남쪽의 생장 요새는 최초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활발할 때, 십자군 출항을 위해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4세는 바다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반란을 감시하기 위하여 재건축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환난을 몸으로 직접 겪었는지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 회의감이 컸는지, 태양왕이 괜히 권력을 틀어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세유가 어떤 곳인가. 피비린내 나는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의 고향 아닌가. 결국 1790년 마르세유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폭도들이 요새 사령관을 살해하고, 이후 혁명기간 동안 귀족과 정부관리를 수감하는 감옥으로 활용되었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축출된 이후에는 요새에 수감되었던 자코뱅 당원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민란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일어날 역사는 일어나고야 만다. 격동의 18세기를 지나 제국주의 19세기에 와서 마르세유 요새는 아프리카 식민지 관리를 위한 전초기지가 된다. 알제리에서 훈련받을 신병들이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생니콜라 요새는 언덕 벼랑 쪽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반면, 생장 요새는 해수면 가까이 있고 바로 옆에 지중해 박물관 '뮤젬(MUCEM)'과 머리 부분이 불균형적으로 넓어 위태로워 보이는 ㄱ자 모양의 '지중해 빌라(Villa Mediterranean)'이 있다. 뮤젬은 직육면체 모양으로 건물 3면을 그물 같은 콘크리트가 얼기설기 감싸고 있다. 밤이 되니 건물 전면에서 파란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치 거대한 사파이어가 놓여 있는 듯하다. 2013년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된 마르세유가 추진한 도시재생사업 프로젝트 '유로메디테라네'의 일환으로 루디 리치오티가 설계하였으며, 그물모양 외관은 지중해의 산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지중해 기후이지만 바람은 많이 부는 해안 항구도시의 특성을 반영하여 구멍 뚫린 콘크리트 건물을 구상한 것은 기능적으로도 좋은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마르세유의 '유로메디테라네' 사업 당시 르 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등 유수의 건축가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건축전공자들에게는 버킷리스트 도시일 것 같다.




다시 82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버스가 아렝르실로(Arenc le Silo) 정류장에 멈추어 서더니 엔진이 꺼졌다. 게다가 기사는 어디선가 올라탄 청년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 차 막차였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기가 종점은 아니겠지?' 나는 멀뚱멀뚱 눈치를 살폈다. 버스는 좀처럼 갈 기미가 안 보였다. 파장이다, 파장. 기사한테 쭈뼛쭈뼛 다가가 물었다. "이거 생샤를역 안 가나요?" "여기가 끝이야. 저기 트램 타고 졸리에테(Joliette) 정류장 가서 지하철 갈아 타." 이렇게 캄캄한 바닷가 도로 한가운데서. 요 앞에는 공사장도 있는 것 같던데. 눈물이 났다. 엉엉. 그래도 나는 트램을 타고 졸리에테 정류장에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숙소로 왔다. 버스기사 말대로 하니 어려움은 없었다. 숙소로 오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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