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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비 오는 연못 위 샤갈의 별자리

DAY 13 니스 시내 관광

이른 아침 다시 몽보롱에 올랐다.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해서다. 7시 30분쯤 버스를 타고 산 중턱 고개에 내려 해가 뜨나 보는데 오늘도 비 때문에 영 가망이 없다. 날은 어두컴컴하고 비까지 온다. <고개의 피자가게(Pizzeria du col)>라는 직관적인 이름의 가게가 있어 들어갔다. 이름은 피자가게인데 실체는 카페이다. 1.8유로의 카페라테가 고소해서 맛있고 가성비가 좋다. 보슬비가 계속 와서 일출은커녕 해가 언제 떴는지도 모르고 8시 30분쯤 그냥 하산했다. 

피렌체에서부터 계속 필요했던 손톱깎이를 샀다. 첫 여행이라 그런지 손톱깎이 챙기는 것도 몰랐다. 조금만 버티면 금방 집에 가는데, 어차피 사면 계속 쓸 수 있으니 그냥 샀다. <종(Bell)> 회사에서 나온 손톱깎이였는데, 한국산이었다. 프랑스에서 한국산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퀄리티는 <쓰리쎄븐(777)>이 좀 더 나은 듯했다. 손톱깎이도 퀄리티가 중요하다니, 뭘 하든 잘해야 칭찬받는다.

오늘 마르세유로 이동하려고 어제 숙박한 호스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기려는데, 카운터가 오늘 쉰다며 지하로 연결된 이웃 호텔에서 체크아웃하란다. 그 호텔과 이 호스텔이 자매인 듯하고,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신기한 영업방식이지만 생각해 보면 괜찮을 것도 같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업체들이 많지 않은가. 입점하는 상품은 다르겠지만 물류 시스템과 컨베이어는 같이 사용할 수 있으니 효율적인 방식임에 틀림없다.

9시 30분에 샤갈 미술관으로 향했다. 어제 산 대중교통 일일권은 오늘 10시 47분까지 사용할 수 있다. 거리를 보니 마티스 미술관까지 갔다 오기는 무리일 것 같고, 샤갈 미술관까지 편도만이라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샤갈 미술관 앞에 버스 정류장이 없다. 다시 지도를 더듬어 기차역 동쪽으로 걷다 보면 언덕 샛길이 보이는데, 쭉 따라 올라가니 샤갈 미술관이 있었다. 아직 9시 35분인데 10시 정각까지 문은 안 열어준단다. 비는 계속 주룩주룩 내렸다.

비를 맞고 있느니, 차라리 버스를 타고 마티스 미술관에 갔다. 이곳도 10시 정각 개관인데 9시 57분 딱 맞게 도착했다. 10시에 들어가서 잘만 하면 10시 40분쯤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탈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 사진촬영은 금지이다. 3분 남기고 카운트다운을 세다가 오픈런했다. 우산을 맡기고 잠바를 락카에 넣어야 하는데 앞에 있는 가족팀이 미적대면서 속을 태웠다. 한국인 성질 어디 안 간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빛의 속도로 정리를 하고 전시관으로 들어가 휘적휘적 관람했다.




앙리 마티스의 화풍을 보면 자유가 넘치는 20세기 남프랑스 출신인 것 같은데, 사실 그는 1869년 프랑스 북부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다. 더구나 원래 딱딱한 법을 전공하고 변호사 서기로 일했다. 마티스 같은 대가도 처음에는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기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었네. 안정된 직장인이 취미생활을 찾듯 마티스도 그림수업을 듣다가, 맹장수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집안에서는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미술에 대한 열정에 눈 뜬 후 23세에 파리로 미술 유학을 간다. 요즘 시대에도 23세에 진로를 바꿀까, 하면 주변의 걱정과 만류가 차고 넘치는데, 당시에는 어땠을까 싶다. 파리에서는 윌리엄 부그로와 귀스타브 모로 등 대가들에게서 배움을 계속해 나간다. 재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시대의 대가들에게 직접 받는 가르침의 가치는 모로 따져도 모자랄 것이다.

처음에는 역시나 북부 프랑스 출신답게 어두컴컴한 색조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창작했지만, 브르타뉴에서 휴가를 보낸 이후 작품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정물에서 인물로, 어두운 색조에서 밝은 색조로 변화하며, 자연광을 바탕으로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뛰어노는 작품들이 시작되었다. 마네, 세잔, 쇠라와 시냐크 등 인상주의의 화풍을 눈여겨봤다가 자신의 그림에 적용하는 시도도 해 본다. 역시 사람에게는 깨우침의 안식이 필요하다. 친구 앙드레 드랭과 함께 한 남프랑스 여행은 마티스의 감각을 최대치로 확장시켜 주었고, 여행은 그가 본격적으로 강렬한 원색 계열의 색채를 활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와 드랭이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비평가들이 "야수들(레 포브, Les Fauves)"이라고 칭한 데서 야수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사실주의의 정교함과 인상주의의 뭉개진 희끄무레함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파랗고 빨갛고 까만색으로 만화처럼 칠해놓은 캔버스를 보았다면 누구나 욕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 같다. "나무야 미안해. 인간의 과욕으로 죄 없는 너를 낭비했구나."하고 한탄했겠지. 하지만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유행을 선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그림은 마니아층을 타고 인기가 올라갔다. '야수파'라는 것은 최첨단 미술의 유행을 선도하는 그룹이 되었고, 마티스는 어느새 '야수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역시 장사는 10,000명보다는 100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프랑스 여행 이후 마티스는 피카소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어쩌면 색채의 폭발과 사물의 재구성은 어차피 한 번은 인사해야 하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21세기 초 미술사조에서 중요성이나 가치가 쌍벽을 이루는 두 인물인 만큼, 서로에게 큰 흥미를 느꼈고 선의의 경쟁상대이자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미술계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였다. 야수파와 입체파가 서로의 양식을 빌려와 실험해 보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면서 작품의 창의성은 증대되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는 파리를 떠나 니스로 이주했다. 남국의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은 그의 작품에서 채도를 한껏 높여주었다. 색채는 더욱 분명하고 주장이 확실해졌다. 2차 대전 직전 1941년, 마티스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았다. 지독한 관절염은 붓을 잡도록 손가락 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72세의 마티스는 너무 노쇠하고 쇠약해졌다. 그는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서 그리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와상에서 작업했다. 과슈가 칠해진 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배치하는 절지화로 작업방식을 바꾸었다. 그림은 더욱 단순화되었고 대상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작품의 성격은 한층 공고해졌다. 83세까지 매진한 샤펠 로자이르 드 뱅스 예배당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마티스 작품은 동시대 회화로서의 인기보다는 후세대인 현재 일러스트로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그때와 지금을 직접 비교하지는 못하겠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림 전시회보다 집을 장식하는 소품에서 더 많이 보인다. 온라인 집들이를 보면 블라인드에는 <춤>이 있고, 책상 테이블에 <이카루스>가, 와인병과 머그컵에는 <나디아> 등 오만군데에 그의 그림이 돌아다닌다. 아마 그래픽과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경계선이 명확한 그림을 따는 것이 더 수월하고, 보기에도 좋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가 희끄무레한 인상주의에 대비해서 마티스의 야수파 그림이나 종이오리기는 컴퓨터 그래픽에 최적화된 모양새다. 게다가 단순하지만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점도 사람들에게 큰 매력 포인트가 되는 것 같다. 인물 드로잉은 심플하면서도 센스가 넘쳐 너무나 프랑스적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뱅스 예배당 장식을 위해 작업했던 그리스도의 고행을 그린 14계 그림 초안 5장이 있었다. 5번째 계를 어떻게 구상할까 고민이 많았나 보다. 연필로 썼다 지웠다 여러 번 반복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대가의 창작도 나의 시험 답안 쓰기와 다를 바가 없다. 대가도 이렇게 고민하는데, 나는 더욱 성실해져야 한다. <푸른 누드>와 <댄스 연작>, <책 읽는 여자>와 성당을 위한 작품들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마티스 생애에 있어서 신의 한 수는 역시 종이오리기인 것 같다. 그림으로 그린 작품들도 훌륭해 마지않지만 종이오리기의 즉각적이고 강렬한 인상, 보고 또 봐도 볼 것이 또 있는 흥미진진함은 다른 어떤 위대한 명화보다도 화제성과 관람객에게 주는 영감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본다. 마티스가 남긴 또다른 유명한 작품, 리소그래피도 일부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계획대로 10시 30분쯤 마티스 미술관을 나와 샤갈 미술관으로 향했다. 한국인의 계획적인 성향, 미쳐 돌아간다. 일일권도 맛있게 끝까지 탈탈 쓰고, 보고 싶던 작가들의 미술관도 모두 가볼 수 있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관람객이 한두 팀에 불과한 한적했던 마티스 미술관과 대조적으로 샤갈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바글바글했다. 샤갈이 인기가 더 많아서 그럴까. 이 사람들이 좀 있다가 마티스 미술관도 갈까. 의문이 들었다. 특히 일본 여행객이 많았다. 

내가 경험한 바로만 따지면 일본인들은 나 홀로 여행자는 거의 없고, 죄다 가족 또는 2인 여행자가 많았다. 특히 동년배의 여성끼리 다니는 경우를 꽤 많이 봤는데, 본국에서부터 같이 온 친구인지 여행 와서 동행을 사귄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유럽여행을 오면 반드시 싸우기 마련인데, '와(和)'를 중요시하는 일본인인 만큼 어쩌면 표출된 갈등 없이 잘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 여행자들은 특히 꼭 두꺼운 여행책자를 들고 다니면서 주요 명소를 유심히 살펴본다. 얼핏 보기에 글씨는 몰라도 그림과 사진이 세부적으로 구석구석 자세하게 찍혀 있고 그 아래 깨알 같은 설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일반인 수준보다는 전공학부생이나 오타쿠 수준의 호기심 해소를 위한 책자이다. 어떤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일까. 적어도 유럽에 오는 일본인 여행자는 탐구정신이 투철한 것이 분명하다.




마르크 샤갈은 1887년 현 벨라루스, 당시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예술적 재능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 초반은 유대인이 겪는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고, 미술만이 가장 쉬웠던 것 같다. 유대인이라서 학교에 다닐 신분증을 빌려야 했다고 한다. 샤갈은 1차 대전 중에 러시아에서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얻었으나, 10월 혁명을 피해 파리로 도피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전쟁 중 그와 30년을 함께 했던 첫사랑이자 아내가 사망하고 실의에 빠진 채 붓을 놓았던 적도 있지만, 결국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 덕분에 다시 창작을 재개했다. 다행히 60세에 새로운 아내를 만나 활력을 되찾고, 프랑스 외무장관 앙드레 말로의 요청에 따라 77세의 나이에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에 천장화를 완성함으로써, 자타공인 프랑스 대표화가의 명성을 높였다. 샤갈은 98세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하면서 장수했다. 불행한 초년운을 극복하고 행복한 말년을 보낼 있었던 같아서 다행이다.

전쟁과 혁명 등 불운한 이유로 고향에 갈 수 없어서인지 그의 그림은 항상 향수에 시달린다. 자신이 고국에 갈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함과 동시에 고국에서도 자기를 불편해했는지 이를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절절하고 슬픈 희망이 평생 부유했던 것 같다. 창작 초반에는 사실적인 풍경화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점점 입체파와 야수파 등 다른 기법을 접목시켜 나갔다. 이후 그의 개성독자적으로 발전하여 그림 그 자체로 결론을 짓기보다는 시나 동화 같은 문학의 일부를 상기시키는 듯한 효과를 내게 되었다. <나와 마을>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는 '샤갈의 내리는 마을'로 잘 알려진 <도시 위에서>도 그렇고 샤갈의 작품들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동요 가사와 아주 잘 어울린다. 원색의 채도를 다양하게 조절한 민속적인 색채나 닭, 소 등 즐겨 활용한 가축의 이미지는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고향의 분위기를 상기시키면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샤갈 미술관 입장료는 9유로, 오디오 가이드도 제공된다. 샤갈이 86세가 되던 해 니스 시에서 제공한 토지에 이 미술관을 설립했다. 1973년 미술관을 건립할 당시의 설계안부터 건물 모형까지 모든 기록이 다 남아있다. 미술관인데 작지만 콘서트홀도 있고 서적류도 있고, 종합문화센터를 생각하고 지었나 보다. 미술관의 최초 재산은 샤갈 생전에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작품들과 유족들이 나중에 기증한 작품들로서, 모두 모으면 4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다작을 해놓으면 나중에 쓸 데도 많은 것 같다. 미술관 중앙 부분에 창세기 등 성경을 소재로 17점의 연작 유화가 있는데, 이들이 정부에 최초 기증된 17점인 것 같다. 이 중에 유명한 <인간의 창조>,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모세와 불붙은 떨기나무>, <십계명을 받는 모세>, <노아의 방주> 등이 있다.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는데, <성서화> 연작은 그가 푸른색으로 아낌없이 채색한 작품들이고 각 작품들마다 푸른색들이 신기하리만큼 채도나 명도가 비슷하다. 반대로 샤갈이 사랑과 부인에 대한 그림을 그릴 때는 또 철저히 붉은색을 많이 쓴 것을 보면 푸른색은 업무용, 붉은색은 개인용으로 분류해 놓았었나 보다. <성서화> 연작도 좋고, 성당 장식을 위한 스테인드 글라스도 좋았는데, 비 내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12궁도> 모자이크가 제일 좋았다. 타일로 된 커다란 그림벽에 마차를 타고 승천하는 엘리야를 가운데 두고 궁수, 쌍둥이, 처녀, 물고기 등 열두 별자리가 원을 이루며 돌아가는 듯한 모습이 끊기지 않는 필름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아래에는 연못이 있고 잉어가 뛰어놀았는데, 비가 와서 수면에 통통 튀기는 모습과 어우러지면서 비 오는 날에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있다면 이 풍경이 1순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갈, 마티스, 고흐, 피카소 등 프랑스 남부는 예술가들의 성지이다. 뜨거운 태양, 일렁이는 바다, 넓게 펼쳐진 평원은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나 보다.




관람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갔다. 마르세유로 가는 기차는 4시 55분 기차인데 아직 1시 30분밖에 안되어 요기를 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카페는 없고 테이크아웃 전문점, 슈퍼, 자판기와 대합실이 전부이다. 그래도 빵이 맛있는 '빵스'이기 때문에 테이크아웃 가게에서 브리오슈, 쇼송, 머핀과 카페라테(8.55유로)를 사 와 대합실에 앉아 먹는데, 이런 꿀맛이 없다. 역시 바게트국 명성 어디 안 간다. 아직도 1시 50분이라 혹시 더 이른 시간으로 표를 바꿀 수 있는지 물어보는데 가장 빠른 열차는 1시 55분이란다. 지금 뛰어가면 탈 수 있으려나. 포기하고 4시 55분까지 기다렸다. 너무 추웠다.

4시 55분 기차를 타고 7시경 마르세유 생샤를 역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니스와 앙티브 사이에서 엄청 예쁜 호텔을 보았는데, 반달같이 생긴 호텔이었다. 나중에 한 번 다시 올 수 있으려나. 마르세유 역은 엄청 웅장했다. 기차역이 무슨 박물관 같았다. '테르미누스 호텔(Hotel Terminus)'는 기차역 나와서 바로 왼쪽에 있는데, 계단만 내려오면 호텔 정문이다. 1박 58유로였는데, 가성비가 좋다. 예약할 때 숙박비가 다 계산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약금 58유로만 받고 총숙박비는 숙박할 때 지불해야 한단다. 화장실 딸린 1인실이 무척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 새로 리모델링했는지 바닥이 마루라서 좋았다. 비즈니스 센터나 컴퓨터 공간은 없고, 같은 건물에 인터넷카페가 있다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인근에 빨래방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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