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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밀라노 대성당, 나의 신부

DAY 11 밀라노 경유 니스 도착

베네치아를 떠나 밀라노를 경유하여 프랑스 니스까지 이동하는 긴 여정의 날이다. 기차 이동시간이 7시간, 밀라노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7시간 반. 밀라노에서는 이탈리아에 올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 밀라노 대성당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에도 들른다. 지금까지의 여정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새벽 6시에 밀라노행 고속열차를 타니 9시경 밀라노 첸트랄(Milano Centrale) 역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이탈리아 북부의 기름지고 너른 평원을 실컷 감상했다. 기차를 타면 논과 산 밖에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가혹한 환경을 보다 이렇게 넓고 완만한 평원이 그득한 외국을 보면 부러움, 시기, 질투가 솟아난다. 이 땅이 우리나라에 주어졌다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요긴하게 썼을까.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어쩜 한반도 환경가 가혹한 환경이어서 한국인들이 그렇게 악착같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밀라노 첸트랄 역 유인 짐 보관소는 지하 2층에 있다. 보관소에 캐리어와 큰 배낭을 맡기고 지상층 로비로 올라왔다. 세상에나. 밀라노 중앙역의 웅장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크기는 궁전을 방불케 하고 내부 장식은 고상하다. 건물 자체만 놓고 보면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두오모 역으로 갔다. 두오모 역에 내려서 대성당 방면 출구로 나오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성당이 보이지 않아도 위엄이 느껴진다. 드디어 출구를 다 나왔다. 아침 푸른 햇빛을 받은 거대하고 새하얀 성당이 두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거대한 건물을 이렇게 감격스럽게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청명하고 새파란 하늘 하며, 그와 대조되어 더 하얗게 빛나는 성당 하며, 휘황찬란하다는 말이 적격이었다.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이 미켈란젤로의 '나의 신부'라면, 나는 밀라노 대성당을 '나의 신부'로 삼아야겠다.

밀라노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취임하자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살루초가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대성당 건립 숙원사업 계획을 건의했다. 위치는 밀라노 정중앙 지점, 옛 로마의 유적지이자 모든 도로가 뻗어나간 곳이었다. 1386년 착공하여, 설계변경과 오랜 시공으로 1577년 헌당하고 1890년 본당을 완공하였고, 부대공사까지 완료된 것은 1951년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왕조 500년'에 비견되는 '대성당 600년'이다. 시공 중일 당시에 완공되지는 않은 성당이지만 착공 100년, 200년 기념식을 했을 것 같아 웃음이 지어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200년간 공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밀라노 대성당은 중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현대의 밀라노 대성당인가.




500여 년 세월 동안 수많은 건축양식을 거쳤다. 1389년 초대 수석엔지니어 니콜라 드 보나방튀르가 고딕양식을 적용했으나, 대주교가 카를로 보로메오로 바뀌고 수석엔지니어도 1571년 펠레그리노 티발디로 바뀐 이후 다시 이탈리아 고유의 르네상스 양식을 부각하기로 했다. 17세기 초,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와 파비오 만고네가 5개 입구, 정면 청동문과 2개 중앙창문을 건립했고, 1649년 카를로 부치가 외관을 다시 최초의 고딕양식으로 되돌렸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하고서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국왕 즉위식을 하고 싶어 안달났다. 이에 프랑스 회계당국 쪽에서 두오모 설립을 위한 전 비용을 일시부담하기로 보장하고 공사를 독촉한다. 새로운 수석엔지니어 프란체스코 소아베에 의해 성당 위쪽 창들에 신고딕 양식의 세부장식이 덧붙었다. 빼곡한 첨탑과 플라잉 버트레스, 프랑스 고딕 스타일의 동쪽 앱스, 팔각형 모양의 르네상스식 쿠폴라, 18세기 시대의 스파이어, 바르코 양식의 세부장식,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 등 수많은 사조와 양식의 장식들 간에 부조화의 조화를 이룬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과도 일견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고, 쾰른 대성당도 떠올리게 된다. 어찌 되었든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으니 모두 다 잘한 일이다. 무얼 하든지 잘만 하면 칭찬받는다. 

높이 156미터, 폭 66미터, 장랑 92미터, 넓이 11,706평방미터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고, 실내 최대 수용인원은 약 4만 명이다. 건축물 외벽에는 3,159개의 성인 조각상이 들어찼고 이 중 2,245개는 외부에서만 볼 수 있다. 옥상 탑은 135개이고, 가장 높은 109미터의 탑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황금상 <마돈니나>가 서 있다. 옥상까지는 자본주의의 대가를 지불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400여 개의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다. 두오모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서 탑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서 표를 사고, 조금 더 돌아가면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옆으로 난 작은 계단을 다시 올라가면 예의 쿠폴라 꼭대기가 아니고 운동장처럼 넓은 옥상이 지붕처럼 경사져 있다. 계단 옆으로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은 작품들이 열을 지어 당당하게 서 있다. 첨탑 끝마다 성인 조각상들이 붙어 있는 것이 꼭 피겨 같다. 피렌체 두오모도 그렇고 밀라노 두오모도 그렇고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모든 조각과 장식이 그대로 꼭 같이 붙어있도록 축소 모형으로 만든다면 내 책상에 진열해 놓고 이따금씩 감상하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Cenacolo Vinciano)>를 관람하기 위하여 카도르나 역으로 이동했다. 여행자들의 경로가 어찌나 고만고만한지, 지하철 밀라노 첸트랄 역의 노선도상에는 밀라노 첸트랄 역과 두오모 역이, 두오모 역 노선도상에는 두오모 역과 카도르나 역 동그라미가 하얗게 바래졌고, 글씨는 거의 다 지워져 있다. 다들 똑같이 대성당에 들렀다가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간 것일 게다. 사람들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 나도 괜히 한 번 문질러 보고 갔다.

<최후의 만찬> 인터넷 예약은 한 달 전부터 시도했으나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긴장된 마음을 안고 전화예약을 시도했다. 전화는 잘 걸려서 상담원께 '영어로 말할 수 있냐.' 했더니, 상담원이 많이 겪어본 일인 듯 천천히 차분하고 친절하게 응답해 주셨다. 이름을 말할 때는 알파벳 구호를 붙여 말하는 것이 좋다. 에이 뽀 알파, 비 뽀 베타, 씨 포 찰리(A for Alpha, B for Beta, C for Charlie) 이렇게 해야 한다. 관람료 6.5유로에 예약비 1.5유로로 8유로 날릴까 걱정되었지만 예약 확인 메일이 잘 온 것을 보고 안도했다.




카도르나 역 밖으로 나오니 오거리와 광장이 보였다. 지하철 역을 등지고 2시 방향이 제수 카르두치(Giosue Carducci) 거리이다. 거리를 타고 200미터 정도 내려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마젠타(Magenta) 소로에 이른다. 우회전해서 300미터 정도 가면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이 나온다. 마젠타 사거리에 성당 푯말이 있으니 길 잃어버릴 걱정은 없다. 카르도소(Cardosso) 거리를 면하고 있는 쪽이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본당 정문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수도원, 그리고 그 안에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구 식당, 현 전시관이 있다.

본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는데 예약시간 1시까지 약 1시간 남았다. 배도 출출하고 입도 궁금하여 주변을 둘러보는데, 성당 바로 건너편에 '오톨리나 르 그라찌에(Ottolina le Grazie)' 카페가 있다.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것이 가격도 꽤 나갈 것 같다. 게다가 유명한 성당 바로 앞이니 바가지까지 씌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곳 말고는 아무 데도 선택지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 갔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식음료품 카페이다. 입구 쪽 계산대에는 사장님이 앉아 계시고, 진열대에는 각양각색 탐스러운 빵들이 무심하게 겹쳐 쌓여 있고, 그 뒤로 커피머신과 주류도 있다. 손님들은 분주히 빵과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그 와중에 사장님과 안면이 있는 듯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쭈뼛쭈뼛 사장님께 주문을 했다. "크라상 2개 주세요!" "직접 꺼내오쇼." 사장님은 시크하고 무덤덤하다. 외양으로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마초인 줄 알았는데, 영어도 유창하고 수완이 좋아 보인다. 나 같은 무지렁이는 거꾸로 매달아 탈탈 털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장사꾼으로 보인다. 

그래도 호랑이굴에서 정신 차린 놈이 살아난다. 나는 쭈뼛쭈뼛 진열대에서 버터크라상, 초코크라상을 하나씩 꺼내 들고 다시 사장님에게 주문했다. "카페라테 1잔 주세요!" "키친에 가서 시키쇼." 사장님은 또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맞받아치신다. 키친에서 카페라테를 받아 쭈뼛거리며 다시 사장님에게 안에 들어가서 먹어도 되냐는 눈짓을 보냈다. 사장님은 역시나 별 볼 일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라는 듯한 눈짓을 주셨다. 

'일단 먹여놓고 20유로 부르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이 앞섰다. 베네치아 코레르 박물관 카페에서는 겨우 샌드위치 1개와 카페라테 1잔에 자릿세가 더해지니 10유로라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여기는 더 유명한 성당 앞이니 20유로도 거뜬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낼 때 내더라도 편하게 먹고 보자.'라는 심정으로 자리를 잡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빵도 맛있게, 커피도 맛있게 먹었다. 여기 빵과 커피는 다른 카페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물론 이탈리아 어느 카페나 커피, 빵이 맛있기는 하지만, 여기 크라상은 정말 맛있다. 커피 빵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부터, 피자, 파스타 같은 식사도 가능한 것 같다. 손님 대부분이 <최후의 만찬> 관람객들이라서 그런지 일본인들이 많은 것 같다. 

맛있게 요기를 하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뒤, 계산대로 가서 고해성사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저는 크라상 2개와 카페라테 1잔을 먹었습니다." "6.5유로 내쇼." 순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사장님이 잘못 계산하셨더라도 다시 계산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라찌에(Grazie)!"라고 외치면서 동전 6.5유로를 재빨리 얹어놓고 나왔다. '이게 그라찌에(감사)의 진실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마리아의 은혜가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진실로 감사의 마음이 들게 하는 카페였다.




전시관 입구에서 출력한 예약메일을 보여주니 티켓으로 교환해 주면서 안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들어가 보니 이미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벤치에 한 자리 남아있길래 냉큼 가서 앉았다. 양 옆으로는 일본인인 것 같았다. 일본어로 된 여행책자를 갖고 왔는데, 신기하게 그 여행책자에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설명이 몇 페이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림에 나온 인물들까지 설명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빈치 덕후 책자 같았다. 우리나라 책도 저렇게 되어 있으려나. 

1시 8분 전이 되었다. 표 검사를 했다. 그리고서는 1차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유리로 된 밀폐실이다. 반도체공정 전 에어샤워로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곳 같다. 조금 있다가 2차 대기실로 들어갔다. 2차 대기실에서는 전시실 안쪽이 보인다. 그림이 보이는 것은 아니고 이전 차수 관람객들이 보인다. 그들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전시실이 꽤 넓은 것 같았다. 그리고 1시가 되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처음엔 아무 말 없이 문이 열리길래 들어가라는 건가, 얼떨떨했는데 들어가서 오른쪽을 보니 '아!' 감탄이 터져 나왔다. <최후의 만찬>이었다. 짐대로 전시실은 꽤 넓었다. 한 20-30평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벽화도 한 개가 아니었다. 입구에서 오른쪽은 <최후의 만찬>, 왼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조반니 도나토 다 몬토르파노)이다. 간접조명을 활용하기 때문에 전시실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양쪽 벽화는 반대편에서는 희미하게 보였다. <최후의 만찬> 앞에는 차단선이 쳐져 있고, 그 앞에 벤치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입체감을 잘 느끼기 위해 그림에서 조금 떨어져서, 거의 전시실 한가운데에서 그림을 보았다. 전시실의 천장과 벽이 맞닿는 모서리가 그림 속으로 뚫고 들어가면서 식당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이 전시실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 그러니까 이곳이 식당이었을 당시에는 빛을 많이 받아서 실내가 환했을 것이다. 저쪽에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고, 그 뒤 쪽에는 창문이 있다. 내 앞에도 식탁이 있었다면 창문이 있는 식당에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와 같이 밥을 먹는 느낌이었으리라. 그 창문에서 환한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이 빵은 내 몸이다. 이 포도주는 내 피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림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조금 가까이 갔다. 벽에 문신을 하듯 그리는 프레스코와 달리 벽을 캔버스 삼아 유화를 그리는 템페라 기법의 태생적 한계가 느껴진다. 인물들의 얼굴과 옷의 주름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곳곳에 흐릿해진 곳이 많았다. 어쩌면 그림은 애초에 다빈치가 그렸던 그 그림이 아닐지도 몰랐다.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가 그리자 마자부터 침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롤라모 카르다노가 '어렸을 때 봤던 것보다 흐려졌고 색감도 잃은 상태'라고 했듯이 한 세대만에 희미해졌을 정도이고, 벽화가 완성된 지 60년도 안 되어 조르조 바사리는 벽화 상태가 '얼룩덩이'라고 비판했다. 이후에 그리스도의 발이 있어야 할 부분의 벽을 뚫어버려 아치형의 출입구를 낸 사태나, 1796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 혁명군이 벽화에 돌을 던졌던 사태,  그림 복원을 시도하다가 뭉개져 버린 색칠공부로만 남은 사태 등 직접적이고 물리적으로 그림을 훼손한 경우도 수 없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1900년이 되기 전에 그림은 말 그대로 이미 '얼룩덩이 뭉텅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림의 원형과 가치를 잊지 않고 1978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을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회복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다. 다빈치가 직접 그리지 않은 <최후의 만찬>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그림의 역사와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면 다빈치가 표현하고자 했던 치밀함과 섬세함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식탁보의 푸른 줄무늬도 선연하다. 멀리서 볼 때나 책에서 볼 때 흐릿해 보였던 인물들의 표정도 내밀한 감정이 드러날 정도로 눈에 들어왔다. 도마, 야고보, 필립보의 경악과 당황이, 베드로의 분노와 성화가 그대로 전해졌다.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15분은 꽤 긴 시간이었다.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만했다. 종료시간이 되자 아쉬움 없이 나왔다.




원래 내 유럽여행 1순위 국가가 이탈리아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생일이 있는 주에 바티칸에서 미사를 보고, 친퀘테레를 예쁘게 찍고, 밀라노 두오모를 실컷 보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3개 다 해보지 못했다. 생일 주간에 로마에 도착했으나 바티칸에서 미사는 못 봤고, 친퀘테레에 갔지만 사진은 다 발로 찍었고, 밀라노 두오모를 2시간 밖에 못 봤기 때문이다. 반쪽 아니 반의 반쪽짜리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탈리아를 떠나는 마당에 남은 느낌은 후련하다는 것이다. 단번에 걸작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습작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어느 작가님의 말씀처럼 완벽하진 않았지만 좋은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탈리아에 또 한 번 올 기회가 있다면 정말 후회하지 않을 여행을 할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가서 벤티밀리아(Ventimiglia) 행 기차를 탔다. 고속열차가 아닌지 베네치아보다 가까운 거리인데 4시간이나 걸린다. 이 기차는 제노바를 경유해서 벤티밀리아로 가는 해안철로를 탄다. 기차를 타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제노바까지 가는 평원이 아름다웠던 것은 셋째 치고, 제노바에서 기차가 방향을 바꾼 것은 둘째 치고(그래서 역방향으로 시작했던 나의 좌석은 어느새 순방향이 되어 있었다), 제노바에서 벤티밀리아 가는 길의 바다 풍경이 장관이었다. 지금까지 본 이탈리아 해안 중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제노바의 해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배경으로 아른아른 실루엣이 펼쳐진 제노바 해안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포지타노는 숨겨둔 휴양지, 친퀘테레는 때 묻지 않은 어촌, 베네치아는 산만하고 즐거운 놀이공원이었다면, 제노바는 세련되고 도도한 항구도시였다. 과거에 비해서 한참 쇠퇴했지만, 제노바는 원래 해양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밀라노, 토리노와 더불어 공업 삼각지대를 형성하였던 도시이다. 거대한 선박과 작은 요트들과 산적한 컨테이너들, 항구와 해변과 해수욕장들. 우리나라로 치면 울산에다가 인천을 더한 느낌이랄까. 그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다음번 이탈리아 여행에 한 가지 일정이 더 추가되었다. 제노바.

그렇게 아쉽고 아련하게 이탈리아를 뒤로 하고 벤티밀리아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벤티밀리아로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빈티밀레(Vintimille)로 부르는 것 같다. 빈티밀레 역에서 1시간여를 기다려서 니스행 열차를 탔다. 우리 칸에 승객은 나밖에 없었다. 이 구간도 제노바와 벤티밀리아를 잇는 구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밤의 초입, 언덕마다 전등을 밝힌 마을이 나타나고 찰방이는 바다에 이따금씩 불빛이 반사되면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 속을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는 밤의 온천탕이 생각났다. 니스 가는 길에 멍통과 모나코 몬테카를로에 들렀다. 종종 사람들이 타고 내렸지만, 신년전야 야간열차라서 승객이 많지 않았다. 게 중에는 말일이라서 한탕 놀아보려고 니스에 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니스에서 새해맞이 파티라도 하나보다.




니스 빌(Nice ville) 역은 공사 중이었다. 공사가림막 사이로 밖으로 나와서 맞은 니스의 첫인상은 우범지대 같았다. 낭만의 해안도시 니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음산했다. 취한 사람들, 노숙자들, 부랑자들. 정상적인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그런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다행히 숙소 호스텔이 기차역에서 5분 정도 거리라서 금방 도착했다. 1박에 14유로 하는 4인 도미토리였는데 호스텔 자체는 깨끗했다. 2층 침대도 깨끗하고 수건도 새로 줬다. 화장실도 깨끗했고, 컴퓨터도 여러 대 있었다. 다만, 호스텔에서 묵는 숙박객들의 질은 보장할 수 없었다. 우리 방에는 나 말고 한국인 여자애 1명과 프랑스인처럼 보이는 여자애 2명이 있었는데, 밤에 얼핏 보니 프랑스인 여자애들이 좀 심상치 않았다. 담뱃잎이었는지 무언가를 종이에 말아서 피우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짐을 풀고 해변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30분 정도 걸어서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12월 말일처럼 으레 해변에서 불꽃놀이도 하고 폭죽도 터뜨리고 다 같이 몰려나와서 한 해를 잘 보내는 파티를 할 것 같았다. '영국인의 거리(Promnade des'Anglais)'라고 엄청 유명하다는데, 아무도 없다. 몇몇 산책하는 가족들만 간간히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대신 인접한 호텔 방들에서 삼삼오오 파티를 즐기는 소리가 왁자지껄 했다. 해변이 아니고 광장에서 파티를 하려나. 마세나 광장 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었다. 길을 찾느라 헤매고 있는데, 그 사이에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고 난리가 났다. 집집마다 그득그득 차 있고 거리에는 나밖에 없었다. 폭죽 소리가 너무 여기저기서 나는 바람에 총소리 같아 공포심까지 들었다.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라고? 타임스퀘어의 카운트다운이나 보신각 행사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프랑스의 새해맞이 행사를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무하게 지나간다고? 이렇게 철저히 나 혼자, 외롭고 쓸쓸함을 느낄 수도 없이 황당과 당황 속에서, 새해를 맞으라고? 내가 여기 왜 왔나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니스에 왔을까. 이탈리아였다면 더 훈훈한 새해맞이가 되었을까. 숙소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래도 같은 여행자들끼리는 인사했을 텐데. 석양의 황홀함에 빠져 열차를 타고 왔건만 프랑스의 첫인상은 황당하고 허무하다. 언젠가 이것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걷다 보니 가리발디 광장에 도착했다.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이탈리아의 통일 영웅이다. 하지만 고향은 니스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통일 영웅을 기리면서 광장을 만들었다. 뭐든 잘 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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