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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성당과 섬, 아웃렛과 정신줄 사이

DAY 10 베네치아 시내 관광

어제 하루 내내 부슬대던 비가 말끔하게 그쳤다. 날이 활짝 개었다. 어제 비가 왔으니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청명한 가을날씨다. 하지만 내 마음은 울적하다. 어제같이 흐린 날 아웃렛을 가고, 이렇게 좋은 날 시내투어를 갔어야 하는데. 도대체 왜 계획에 오류가 있었던 건지, 뭐가 미흡했던 건지, 경위서라도 쓰고 싶다. 

기차역 앞 페로비아 정류장에서 바포레토 12시간권을 끊었다. 베네치아 3일 차에야 처음으로 수상버스를 탔다. 리알토다리에서 내려 다리를 올라갔다. 베네치아 대운하에 있는 3개의 다리, 리알토, 아카데미아, 스칼치 중 제일 크고 아름다운 다리이다. 다리 자체보다도 다리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풍경이 절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본 바로는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바라본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가장 아름다웠다.




2번 바포레토를 타고 산자카리아 정류장을 거쳐 산조르지오 섬의 정류장에 내린다. 산조르지오 섬은 10세기부터 19세기초까지 베네딕트 수도회의 본산이었다. 이곳에는 '로톤다의 아버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산조르지오 마죠레 성당이 있다. 섬에는 성당만이 거의 유일한 건물이라 섬 자체가 건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성당은 대운하 아니, 이제는 바다의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산마르코 광장을 마주 보고 있다. 산조르지오 마죠레 성당은 산마르코 성당과 균형을 이루고 성당 탑은 산마르코 종탑과 균형 잡힌 대칭을 이룬다. 

성당은 1565년 설계하여, 1631년 완공하였다. 팔라디오의 고전건축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걸작이다. 입구 파사드는 그리스 신전 입구 2개를 겹쳐 놓은 듯한 모습으로, 앞부분 입구는 키가 크고 좁고, 뒷부분 입구는 키가 작고 넓다. 이거 완전 꺽다리와 뚱뚱보다. 같은 형태이지만 서로 다른 규모의 문을 겹쳐 놓으니 방문객들에게 어서 옵시오, 하고 말하는 듯도 하고, 앞부분보다 건물에 붙어있는 뒷부분이 더 넓어서 그런지 들어서면서 웅장한 느낌에서 안정적인 느낌으로 바뀐다. 뒷부분 입구의 진짜 문은 아치형태로 그리스 건축에 로마 건축을 한 스푼 섞은 느낌이다. 내부 네이브 양쪽 기둥은 그리스 건축 같은 모양으로 네 개씩 짝을 이루어 가며 궁륭을 받치고 있고 궁륭에 들보는 보이지 않는다.

제단에는 역시나 틴토레토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남아 있다. 제단에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으니 묘한 느낌이 난다. 미사 볼 때 '이 것은 내 몸이다. 이 것은 내 피다.' 하는 말이 더 실감 날 것 같다.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포도주와 빵을 나누어주는 모습이다. 역시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테이블은 화폭의 대각선으로 놓여 있고, 오만가지 사람들이 제각기 분주하다. 물통을 들어 발을 씻어주는 사람, 흥분한 듯 일어나서 대화를 하는 사람, 빵을 더 달라는 듯 팔을 뻗어 요구하는 사람. 들리지 않아도 시끄럽고 정신없다. 그리스도의 후광이 작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생기 넘치고 발랄하다. 우리네 일상과 닮아 있다.




수로 주변의 집들이 아름드리 색색깔을 뽐내 뮤직비디오 배경으로도 많이 이용되는 부라노 섬에 가볼까 하여 14번 바포레토를 타고 11시경 푼타 정류장에 도착했다. 부라노섬 가는 12번 바포레토는 11시 52분에 있는데, 너무 늦다 생각하여 본섬 폰다멘테 노베 정류장에서 더 먼저 출발하는 12번 바포레토를 일찍 탈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다시 14번 바포레토를 타고 산마르코 광장에 이동하니 11시 30분이다. 이 정도면 아가 푼타 정류장에서 그냥 기다릴 걸 그랬다. 폰다멘테 노베역까지 걸어가는 도중 산라자로 데이 멘디칸티 성당을 지나쳐 가는데 벽화가 대단하다. 멀리서 봤을 때, 벽감을 파고 조각을 놓은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것이 벽화였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와 같이 멀리서 볼 때는 정말 깜빡 속았다. 착시그림은 어디까지 발전하는 것일까. 폰다멘테 노베역에 12시경 도착해서 1번 바포레토를 타고 12시 30분경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에 도착했다. 무라노섬은 예정에 없었는데 괜히 오게 되어 또 짜증이 났다. 무라노섬을 둘러보고 아웃렛에 가려면 부라노섬을 못 갈 것 같은데, 부라노섬이 못내 아쉬웠다. 부라노섬의 특산품인 레이스는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고 가격도 저렴해서 기념품으로 딱 좋을 텐데, 무라노섬의 유리공예는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깨질까 봐 살 수도 없다. 쓰린 마음을 달래며 빨리 둘러보려고 다녔다.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다. 전통이 길고 아름답다고 하니 '잘 만들었으면 아름답겠지.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고 봤는데 정교함과 창의력이 신기하고 놀랍다. 큰 작품은 큰 대로 입이 벌어지고, 작은 작품은 작은 대로 앙증맞은 것이 귀엽다. 유리공예도 미술의 분야라 색감이 중요한 것 같은데, 작가들의 색깔 조합과 모양에 아이디어가 너무 다채롭고 풍부해서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게 만든다. 바포레토 정류장 앞에는 기러기떼인지 오리 떼인지 막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모습을 순간순간별로 포착해서 여러 마리의 새를 장대 위에 앉혀 놓았는데 감쪽 같이 진짜 새 같다. 한 공방은 유리로 만든 풍선이 특기인 듯 창가에 여러 개의 풍선을 매달아 놓았다. 창밖에서 보기에는 진짜 풍선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 한없이 가볍다. 유리로는 기껏해야 화병이나 거울 같이 유리가 꼭 필요한 용도로만 실용품을 만들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컵과 컵받침, 티스푼과 스푼 받침대까지 이루어진 세트나 여러 동물들로 이루어진 사파리 장식품, 악기를 연주하는 아기천사 장식품을 보니 너무 사랑스럽지만 깨질까 봐 사 갈 수는 없는 현실에 두고두고 아쉬웠다.

내리쬐는 햇빛과 햇빛을 반사해서 오색으로 반짝이는 유리공예를 보고 있자니 우울했던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미리 알아보고 공방 체험 예약까지 했더라면 더 보람찬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부라노섬에만 집착하여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베네치아 근교의 노벤타 디 피아베 아웃렛으로 길을 떠난다. 노벤타 디 피아베 아웃렛은 베네치아 북동쪽 피아베 지역에 위치한 아웃렛이다. 유럽지역 아웃렛 체인으로 유명한 맥아더글렌사의 지점이다. 베네치아 트론체토 정류장 모노레일 피플무버 정류장 앞 대형 주차장에서 오전 10시 또는 오후 2시에 출발하고, 복귀는 오후 3시 또는 저녁 7시에 한다. 트론체토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약 50분 정도 소요된다.

오후 1시경 무라노 파로 정류장에서 4.1번 바포레토를 타고 타고 피아잘레 로마 정류장에 도착했다. 원래 피아잘레 로마 정류장에서도 2번 탈 수 있는데, 또 삽질하느라 페로비아 정류장으로 이동해서 2번 바포레토를 탔다. 가는 동안 셔틀버스를 또 놓칠까 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1시 50분에 트론체토 메르카토 정류장에 도착했다. 셔틀버스는 트론체토 메르카토와 트론체토 정류장 사이 큰 주차장에 있었다. 모노레일 피플무버 정류장 앞 쪽이다. 트론체토 메르카토 역에서 나와서 큰길로 나온 다음 왼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리야, 제발 나 좀 살려라. 간당간당하게 1시 55분에 셔틀버스에 올랐다.

아웃렛은 탐나는 것도 없고 그냥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갔는데, 나올 때 되니까 영수증 보면서 '내가 정신줄을 놓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테가 베네타, 페라가모, 프라다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다만 각 브랜드의 시그니처 상품들이나 유행 타지 않는 고전적인 디자인은 없고, 이상한 디자인의 정말 딱 이월상품 재고처리인 것이 보인다. 그래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소매가와 아웃렛가격을 같이 적어놓으니까, 안 사면 손해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서운 곳이다.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날, 무서움에 치를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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