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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DAY 9 베네치아 시내 관광

아침부터 부슬비가 온다. 여행은 날씨가 절반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비나 흐린 날을 많이 맞아서 불쾌감이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만족감이라면, 좋은 계절의 이탈리아는 얼마나 좋을지 상상이 안 간다. '이런 날 아웃렛을 가야지.' 하고서 부랴부랴 숙소를 나와 기차역을 지나 다리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10시에 출발하는 아웃렛 셔틀버스를 찾는데, 버스가 없다. 분명히 피플무버(People Mover) 앞이라고 했는데. 물어봤더니, 수상버스 '트론체토' 정류장 피플무버로 갔어야 하는데, '피아잘레 로마' 정류장 피플무버에서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미 시각은 9시 45분. 트론체토 정류장까지 가기는 무리다. 나는 어이없게 참 생각지도 못한 데서 병맛 같은 능력이 있다. 분명히 피플무버긴 피플무버였는데. 원래 오늘 계획은 아웃렛 다녀와서 오후 5시에 페니체극장 송년음악회를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계획이 틀어졌다. 기차를 타고 아웃렛에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기차비도 내고 올 때 왕복비 10유로 전부를 내고 셔틀버스를 타기가 아까워서 그냥 내일로 미뤘다. 결과적으로 이 날 아웃렛을 갔어야 했는데 못 갔기 때문에 이틀 동안 후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산로코 대회당(Scoula Grande di San Rocco)으로 향했다. 산로코 대회당은 자선기관 성 로코 재단의 본사다. 성 로코는 전염병을 물리치고 건강을 돌봐주는 성인인데, 아마 흑사병 극복을 기념해서였는지 1478년 재단이 설립되었다. 대회당은 베네치아의 대가 틴토레토의 역작들을 한 큐에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틴토레토라는 말은 원래 '작은 염색공'이라는 뜻의 일종의 예명이고, 본명은 자코포 로부스티이다. 예명을 기술인으로 지은 것 보면 애초에 거창한 예술을 하기보다는 빠른 손놀림과 좋은 수완으로 다작을 하기로 마음먹었었나 생각이 든다. 

1564년 대회당을 중앙홀 '살라 델랄베르고(Sala Dell'albergo)'를 장식하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예명대로 틴토레토는 빠른 작화속도로 유명했다. 콘테스트가 열리면 경쟁자들은 초안 데생 스케치를 가져오는 반면 틴토레토는 채색본을 가져왔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선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욕 했겠지. '이걸 이렇게 다 그려오면 어쩌라고.' 더불어 틴토레토는 <로코 성인에 대한 찬미>도 무료로 기증했다. 이 정도면 거의 강매가 아닌가 싶다. 첫 계약을 계기로 틴토레토는 산로코 대회당의 거의 전속화가처럼 활동한다. 1565년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완성했고, 1567년 홀의 장식을 마감했는데, 홀의 장식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소재로 한다. 1576년부터 1581년까지 2층 홀의 천장 및 벽에 <놋뱀> 등 구약성서 내용을 중심으로 25점을 그렸고, 1582년부터 1587년까지는 1층 홀에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담은 8점의 유화를 더 그렸다. 이 정도면 공무원이다. 궁정화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안정적인 직업에 그 일대에서는 유지였을 수도 있겠다. 틴토레토가 대회당에 그린 모든 작품을 합치면 글을 모르는 문맹도 성경 일화를 습득할 수 있는 거대한 성경 그림책이 된다. 정말로 이 그림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해도 좋을 것 같은데.

2층 대회의실에 들어가면 천장화를 보느라 고개가 떨어질 것 같은 여행자들을 위하여 거울이 비치되어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성당에는 앉아서 보라고 의자를 배치해 놓았는데, 여기는 의자는 물론 거울까지 대령해 놓았다. 서비스 정신이 좋은 것 같다가도 거울의 크기를 보고는 의아해진다. 이걸 들고 보라는 건지 바닥에 놓고 보라는 건지. 거울이 거의 허리까지 오는 상반신용 벽걸이 거울이다. 무게가 어마어마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나름 쏠쏠하게 잘 이용했다. 나이가 들고 시력이 안 좋아지니 미술작품이 더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거리감이 없어져서 그런가. 어떤 패널은 정말 착시미술처럼 보였다. 눈이 나빠진 걸 슬퍼해야 하나, 기뻐해야 하나.

틴토레토는 실력이나 명성으로 보자면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물론이고 티치아노 보다도 한참 아래이지만 구도의 역동성만큼은 누구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두칼레 궁전의 <천국>도 그렇고 산로코 대회당 그림들도 그렇고 거대한 그림을 놀라운 속도로 그렸다고 한다. 머리에 지나가는 장면을 찰나에 잡아서 화폭에 옮긴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안정적으로 앉아있거나 서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들 엉덩이가 들썩들썩하기도 하고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것도 같다. 180도 뒤집어져서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성 마르코의 기적>에서 성 마르코는 보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로 뒤집어져 있다. 

사진문화가 널리 퍼지고 사진 찍는 비용이 인하되면서 이제는 정형화된 경직된 사진보다 스냅사진을 더 많이 찍는데, 르네상스 미술에서의 구도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에서 시작해서 점점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 그림 같은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보슬보슬 비는 계속 내린다. 본섬 제일 끝까지 이동해서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에 도착했다. '건강과 안녕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날이 맑으면 하늘색 쿠폴라가 더 환하게 빛나고 예뻤을 것 같다. 흑사병을 퇴치하고 설립한 성당이라 그런지 아직은 우울이 서려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으로 지은 건물이다. 

1630년경 흑사병으로 인해 베네치아 인구의 30%가 절멸했다. 내 왼쪽 아니면 오른쪽 두 집 중 한 곳은 상갓집이라는 말이다. <페스트>를 읽어도 실제 감염병이 도시를 휩쓰는 풍경이 잘 상상되지는 않는다. 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피를 통하고 뒤집어서 죽었다는 것이 과연 요즘 시대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람이 까맣게 변하고 혹이 나더니 죽는 것이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서 누구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누구는 또 이겨내고는 했을 것이다. 정확한 원인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온갖 민간요법과 근거 없는 유사의학이 판을 쳤을 것이다. 동네에는 멈추지 않는 피 냇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코를 찌르는 피 비린내에 멀미가 났을 것이다. 이 지옥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제발 우리 가족은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주의 기도'에서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기도하는데 '성모송'은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하고 기도한다. 주이신 하느님은 나를 심판하고 상벌을 내리는 분이지만, 성모마리아는 성인들과 같이 나를 도와주고 내 편을 들어주는 분이다. 하느님은 맨날 벌만 내리는 분이다. 노아의 방주도 그렇고, 애굽의 장자도 그렇고. 하느님께 "이제 그만 병 좀 물리쳐 주세요." 하고 빌면, 하느님은 "이것들이 아직 매운맛을 못 봤군. 이게 다 너희 자업자득이다." 하고 더 혼내실 것 같다. 하지만 성모마리아는 은애와 인자의 상징 아닌가. 내가 좀 잘못한 게 있어도 "사람이 다 그렇지요 뭐." 하면서 너그럽게 봐주실 상이다. 그리고 성모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니 아무래도 발언권이 좀 있겠지. 말하자면 저 같은 쇤네를 위해서 마님께서 좀 잘 말씀 좀 해주십시오, 하는 셈이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아예 인정하지 않지만 성모마리아는 적어도 삼위일체 다음으로 중요한 분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하느님께 바로 기도하기보다는 성모마리아를 경유해서 구원의 기도를 올렸나 보다.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에서는 유독 성모마리아께 바친 성당이 많은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테나나 성모마리아나, 사람들은 항상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바치고 싶어 하나 보다.




1631년 베네치아 공화국 의회는 전염병이 끝나면 성모마리아께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헌납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흑사병은 끝났다. 설계안 공모를 거쳐 무명 건축가 발다사레 롱게나의 안을 채택한다. 그전에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이 없었던 발다사레 롱게나는 성당이 완공되고 1년 후 사망한다. 그의 모든 생애를 바친 역작인 셈이다.

성모마리아의 두건을 상징하듯 푸른색 돔은 거의 완전한 구형으로 완전한 수를 상징하는 팔각형의 바로크 성당에 안정적으로 얹혀 있다. 마치 공을 담기 위해 컵을 만든 모양새다. 이런 느낌, 판테온에서도 받은 것 같은데. 정문은 그리스 신전 모양의 기둥벽에 삼각형 파사드를 올려 개선문 같기도 하고 판테온 입구 같기도 하다. 8개의 건물 면의 벽감과 꼭대기마다 모든 천사와 성인들의 가득 차 있다. 좋아하는 피겨를 성당에 전시해 놓은 것 같다.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좋아하는 성인을 붙잡고 소원을 이야기하라는 뜻인 것 같다. 거대한 크기의 성당에 오밀조밀 장식을 새겨 넣어 어여쁘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원형극장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돔 아래로 2개의 층으로 나뉘는데 층고가 높은 1층은 8개의 각 면마다 아치가 들어있고 그 아치는 사반구 모양이다. 2층에는 각 면마다 2개 씩의 아치창문이 들어 있어 내리쬐는 햇빛이 본당 구석구석 비춰준다. 팔각형 건물이라 그런지 여타 성당들과 다른 구조의 신랑(nave)모양이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팔각형 모양의 성전은 성모 마리아의 자궁을 상징하는 중앙 원에서 여덟 곳으로 쏘아나간 성모 마리아의 별을 상징한다. 신도석은 8각 면을 따라가며 놓여있고, 성당 정중앙 원형 부분은 아무런 구조물 없이 비어 있다. 십자가의 교차 부분에 쿠폴라가 위치한 다른 성당들로부터 응용하여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의 쿠폴라는 성당 한가운데 있다. 쿠폴라 안쪽 천장은 천장화 없이 밋밋하다. 제단과 벽들에는 틴토레토와 티치아노의 작품이 있다. 

매년 11월 21일 페스타 델라 마돈나 델라 살루테(성모 헌정 축제) 때 베네치아 공직자들은 산마르코광장에서 별도로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와 감사행사를 개최한다. 제사를 잘 치르면 조상신이 항상 보우하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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