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대협 May 23. 2024

그림 보러 우리 집 놀러 와

DAY 8 베네치아 도착

두칼레 궁전과 수로 건너편 감옥을 잇는 다리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이다. 다리라고는 하지만 사면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걸어가다 보면 그냥 복도를 지나는 것 같다. 옛날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죄수들이 법정에서 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이송되면서 건넜던 다리로서, 창문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해서 한숨을 쉬었다는 곳이다. 특히 카사노바(Casanova)도 이 다리를 건넜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항상 카사노바가 도대체 두칼레 감옥을 어떻게 탈출했을까, 하면서 궁금해한다. '새로운 집'이라는 뜻의 이름조차도 실존인물 같지 않다. 백작에게 뇌물을 써서 혹은 백작부인과 정분을 통해서 탈출했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니다. 카사노바는 그냥 다른 탈옥범들이 탈출하듯이 벽, 엄밀히 말하면 천장을 뚫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탈출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이다. 




1725년 베네치아에서 출생한 자코모 카사노바는 고향을 떠나 25세경 파리에서 이 마을 저 마을 옮겨 다니면서 오페라 소재 같은 오입질을 계속했다. 비밀스러운 의례에 대한 흥미 때문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해서 쓸만한 인맥과 검열되지 않은 지식도 얻었다. 더불어 장미십자회에도 관심을 보였다. 카사노바는 파리에 2년 머무르면서, 언어를 배우고 극장에 다니고 유명인사들과 조우했다. 그러나 곧 그의 수많은 애인들이, 그가 다녀갔던 거의 모든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파리 경찰에 들통났다.

어쩔 수 없이 카사노바는 1752년 드레스덴에 이어 프라하,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도덕적 분위기는 카사노바의 취향이 아니어서 1753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문란한 행위를 계속해 나가면서, 적들을 양산하고 경찰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의 경찰기록은 신성모독, 추행, 폭력, 풍기문란으로 점점 늘어났다. 한 감시인이 카사노바의 신비주의, 프리메이슨 행적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의 소장도서를 금서목록으로 지정했다. 그나마 그와 연줄이 있던 브라가딘 백작이 그에게 당장 떠나지 않으면 극단적인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심각하게 충고했으나, 이튿날 30세의 카사노바는 체포되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귀족들은 그를 '납덩이'에 가두기를 원했다. '납덩이'라는 말은 납으로 지붕을 감싸고 있는 두칼레 궁전 동편 꼭대기층에 위치한 7개의 감방을 말하는 것이다. 중형의 죄인이나 정치범들을 가두는 교도소였다.

카사노바는 옷 한 벌, 초라한 침상 한채, 책걸상이 있는, 어둠과 베네치아의 여름 열기, 그리고 벼룩들이 들끓는 최악의 감방에 갇혔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감방동료를 사귀고, 브라가딘 백작의 호의로 겨울이불과 좀 더 좋은 음식을 제공받았다. 카사노바는 체력단련 중에 쇠 막대기 하나를 찾았다. 이후 약 2주 동안 그것을 뾰족하게 갈아서 그의 침대 밑에 구멍을 파 봤는데, 재판관 사무실이 그의 방 바로 밑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카사노바는 도시에 축제가 열려 아래층에 재판관과 교도관들이 아무도 없을 때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허나 아뿔싸, 탈옥시도 3일 전에 더 넓고 좋은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현재 방이 더 행복하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는 카사노바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인사불성 상태로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굳어버린 동상처럼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았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아예 희망이 없어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나에게 남은 편안함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다시 타성을 이기고, 새로운 탈출계획을 세웠다. 이웃 감방의 발비라는 파계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사노바는 쇠 꼬챙이를 팔걸이의자에 숨겨서 갖고 들어와서는, 발비가 교도소장을 속이려 넓적한 파스타 접시 밑에 들여온 책에 숨겨서 발비에게 전달하였다. 발비는 그의 천장에 구멍을 내고, 카사노바의 방 천장에도 구멍을 내었다. 카사노바는 감방동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발비가 낸 천장구멍으로 사라지면서, 쪽지를 남기며 시편 115편(불가타역 기준)을 인용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신의 위업을 전할 것이다."

카사노바는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 발비와 함께 두칼레궁전의 납판과 지붕을 건너갔다. 바로 수로로 떨어지는 것은 위험했다. 카사노바는 지붕에 난 창을 통해 안쪽 방을 살펴보고 창문을 깨서 진입했다. 지붕에서 발견한 사다리와 방에서 갖고 온 '침대보 밧줄'을 이용해서 25피트 밑에 있는 방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궁전 복도, 갤러리들과 방을 지나쳐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경비들에게 자신들이 공식연회의 손님이었는데 우연히 어떤 방에 갇혀있었다고 속이고 문을 통해 나왔다. 카사노바는 1757년 1월 5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날은 로베르 프랑소와 다미엥이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날이었다.

일부 의견에 따르면 카사노바의 탈출기를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단순히 후원자에게 뇌물을 건네서 탈출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천장을 수리했다든지 하는 물리적 증거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탈옥시도는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787년 카사노바가 직접 서술한 '나의 탈출기'에서 증언했다. "결국 신께서 나에게 탈출에 필요한 것을 주셨다. 기적이 아니라면 놀라운 것일 것이다. 나는 내가 운 좋게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용기에 자랑스러운 것이다."

카사노바는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나는 깨달았다.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역량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위대하고 강력한 친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엄격한 자기 통제와 카멜레온 같은 가변성을 지녀야 함을." 파리를 다시 찾은 그는 예전보다 성숙했고, 아직은 비록 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더 계산적이고 치밀했다. 그의 첫 번째 과업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옛 친구이자 지금은 외무장관이 된 베르니에게 연락했다. 그의 후원자는 호응을 얻기 위해서 국가를 위한 자금을 모아보라고 조언했다. 카사노바는 즉시 최초의 국가복권위원회의 이사이자, 최고의 판매원이 되었다. 복권사업은 그에게 즉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자금을 모으자 그는 상류사회를 돌며 다시 유혹을 시작했다. 카사노바는 특유의 신비주의로, 그를 마치 수비학의 마법사의 돌을 갖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의 특출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특히 잔느 뒤프 후작부인과 같은 주요 인사들을 후리고 다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를 속이는 것은 영리한 사람이 할만한 공적이었다."

카사노바는 장미십자회원이고 연금술사라고 소개하면서 마법사의 돌을 찾는다는 둥 하면서, 마담 퐁피두르, 생제르망 백작, 알램버트, 장 자크 루소 등과 같은 동시대의 저명한 인사를 찾아다녔다. 귀족사회에서 연금술이 큰 인기를 끌자, 그런 류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카사노바를 찾는 곳이 많아지고 그 역시 즐겨 찾았다. 그러나 생제르망 백작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기이하고, 사기꾼 중에 가장 뻔뻔하다. 그는 태연하고 태평하게도 자기가 300살이나 되었다고, 자신이 우주의 묘약을 갖고 있다고, 아무것으로나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사교활동을 이어가던 카사노바는 됭케르크 지역에 스파이로 파견됐다. 카사노바는 신속한 업무처리로 사례를 괜찮게 받았는데, 이 노작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앙시앵레짐과 그가 의지하고 있던 계급에 대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모든 프랑스 장관들은 다 똑같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주머니로부터 돈을 갈취해서 그들 자식들을 먹인다. 그들은 절대적이다. 탄압받은 사람들은 아무 데도 믿을 데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 부채와 금융혼란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혁명은 당연하다."

7년 전쟁이 시작되자, 카사노바는 다시 국가재정을 증가시키도록 정부로 불려 왔다. 그에게 당시 유럽 최고의 금융 중심지이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국채를 파는 업무가 주어졌다. 이듬해 그는 순이익으로만 방직공장을 차릴 정도로 성공했다. 프랑스 정부는 매우 흡족해서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주고 재정부에서까지 일하도록 제안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아마도 그의 방랑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사노바는 최고점에 다다랐으나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는 방만한 경영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대출받았고, 그의 '하렘'에 들어온 여직공들을 위시한 영구적인 애인들에게 그의 부를 지출하였다. 그는 또다시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으나, 뒤프 후작부인의 탄원 덕분에 4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원자 베르니가 루이 15세로부터 신망을 잃었고, 카사노바는 위협이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서 또다시 도망쳤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프러시아, 심지어 스페인까지 거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로마에서 자신의 도망 일생 등을 소재로 집필을 하던 중, 1774년 고향 베네치아에 입국을 허가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최초의 탈출 이후 18년 만이었다. 

베네치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납덩이'에서의 탈출 등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제 카사노바는 후원자들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자립을 통해 먹고살기를 희망했으나, 인세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어쩔 수 없이 저잣거리의 돌아다니는 소문거리에 기반하여 종교, 상업 등을 주제로 기사를 쓰고 소규모의 보수를 받았다. 카사노바는 늙어 가는 중이었다. 도박을 하자니 돈이 없었고, 여성을 후리자니 외양이 추해졌다. 그의 명성을 기억하는 사람은 사라졌고, 그의 어머니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와중에 볼테르와 종교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카사노바가 물었다. "미신을 철폐한다면,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거요?" "뭐요? 내가 인류를 탐식하는 흉포한 괴물을 처치한다면, 나한테 그걸 대신할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요?" 카사노바는 탄식한다. "그가 진정한 철학자였다면, 그냥 입 닥치고 있어야 했다. 집단의 안녕을 위해 인간은 무지 속에 살 필요가 있다." 

1783년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귀족들을 조롱하는 글을 썼다가 또 추방당했다. 그는 파리로 떠나서 비행풍선이동학회에 참석한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났고, 또다시 체코로 떠났다. 말년에 카사노바는 미치지 않고 슬픔에 싸여 죽지 않기 위해 자서전 집필에 몰두했다. 가끔은 자서전이 너무 노골적이고, 현존하는 사람들의 명예를 고려하여 출간하지 말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출간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어보다 더 많이 쓰이는 프랑스어로 말이다. 그는 <회상록> 첫 부분에 이렇게 썼다. "생애에 걸쳐 내가 행했던 좋고 나쁜 일들을 통해, 나는 내가 상을 받거나 죄를 지었다고는 것을 인정하고 나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임을 시인하게 된다. 내 가슴속에서 자란 귀한 원칙들의 필연적인 귀결인 뛰어난 도덕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 생애동안 감각의 희생자였고, 타락 속에서 희열을 느꼈고,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다. 나의 불찰, 어린 날의 불찰. 내가 그것을 보며 웃는 것을 알고 당신이 관대하다면 당신도 나와 같이 웃게 될 것이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하였다. 카사노바가 고향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카사노바는 체코에서 1798년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철학자로 살다가 교인으로 죽었다."




피렌체의 망나니 벤베누토 첼리니에 비하면 카사노바의 생애는 간소한 줄거리이다. 살펴보면 기술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문예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조차도 베스트셀러를 내기에는 모자란 글재주였던 것 같다. 말도 못 하게 수려한 외모도 아니었던 것 같고 오히려 평균보다 조금 뒤처지는, 하지만 여성을 유혹하는 스킬이 뛰어났던 일종의 러브코치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카사노바를 색마로 단정하며 폄하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원하는 사람을 누구든지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사교성이 있었고, 때문에 능력 있는 스파이였고, 복권사업을 성공시킬 만큼 장사수완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비록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걸출한 능력인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색마, 색광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다방면 연예인 같은 능력이 아깝다. 




두칼레 궁전에서 나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Gugenheim Collection)으로 향했다. 일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앞까지 가본 적은 있는데 아쉽게 미술관 관람을 못하여 여기는 꼭 가보기로 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 베네치아, 빌바오, 베를린에 있어 죽기 전에 네 군데를 다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구겐하임 미술관들은 소장품보다도 건축물 자체의 명성이 높다.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했다. 세탁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뉴욕 구겐하임은 정확히는 화분 모양이다.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원통형 건물에 층과 계단이 없이 1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나선으로 쭉 이어진다. 관객들은 쇼핑을 하듯 설렁설렁 위아래층을 산책하며 작품을 감상한다. 한 자리에 서서 긴 시간 동안 심도 있게 작품을 감상해 달라는 작가들의 요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게 과연 미술관으로서 맞는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첫인상과 직관성을 중요시하는 오늘날의 유행과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가운데 텅 비어진 중정 같은 공간은 현대 설치미술을 전시하기에도 적격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이런 시대를 예상하고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상상을 덧붙인다면 이런 화분 모양의 클럽이나 공연장을 만들면 인기가 많을 것 같다. 가운데가 뻥 뚫려 있어 누군가는 춤과 공연을 즐기고 그 위층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에서 누군가는 또 내려다보는 형태는 관종과 관음증을 모두 충족시켜주지 않을까.

빌바오 구겐하임은 프랭크 게리가 설계했다. 물고기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이 건물은 직선이 하나도 없어 굽어지고 휘어지며 물살을 따라 꿈틀거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티타늄으로 벽체를 마감하여 맑은 날과 흐린 날에 따라 다르게 하늘빛을 희미하게 반사해 내면 물고기 비늘 같은 느낌을 준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덩그러니 떨어진 거대하고 강철판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을 베일 것 같아 어쩐지 두려움이 든다.

유명 건축가들의 독특한 건축물로 명성을 얻은 다른 구겐하임들과 달리 이곳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은 전형적인 저택 가정집에 자리를 잡은 미술관이다. 도보로도 갈 수 있지만 수로로도 접근이 가능하여 부유한 저택의 느낌이 물씬 났다. 페기 구겐하임 여사는 18세기에 건립되었던 이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를 매입하여 사망 시까지 30여 년간 거주했다고 한다. 페기 여사 생전에는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은 아니었고 저택에 그냥 컬렉션을 모아두고 계절별로 사람들에게 공개했었단다. 그러던 것을 페기 여사 사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베네치아 분관을 공식 개관하여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으리으리한 미술관만 보다가 가정집 미술관을 보니, 새삼 하우스콘서트를 열던 박창수 피아니스트님이 떠올랐다. 집에서 즐기는 예술이라, 생각만 해도 편하고 신난다. '우리 집에서 피아노 연주할 건데 놀러 와! 우리 집에 그림 있으니까 놀러 와!' 음악이나 미술은 모르겠고, 도서관이라도 만들고 싶다.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 여사의 아버지는 타이타닉호로 사망한 부유한 실업가 벤자민 구겐하임이고 삼촌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한 솔로몬 구겐하임이다. 젊은 나이에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20세기초 활발하게 전시회를 개최하고 예술가들을 발굴 육성할 수 있었다. 삼촌 등 가문의 피에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흐르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페기 여사가 직접 쓴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으로 볼 때, 애초에 미술에 대해 대단한 전문지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찌 보면 교육과 학습을 통해 식견을 배양한 결과인 것 같다.

페기 여사는 21세에 재산을 상속받자마자 22세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이때 결정적으로 <샘>의 작가이자 다다이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마르셀 뒤샹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전시회와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을 습득하고 다다이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 당대의 유행을 간파하였다. 만 레이, 콘스탄틴 브랑쿠시, 막스 에른스트 등과 각별하게 지내면서 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혀 갔고, 막스 에른스트와는 결혼도 했다. 

40세가 되던 해 런던에 '구겐하임 죈느(Guggenheim Jeune)'라는 갤러리를 개관하고 하루 한 점 미술작품을 구입하여 초현실주의 컬렉션을 완성한다. 44세에 뉴욕으로 다시 건너가 그간 수집한 유럽작품들을 토대로 '금세기미술 화랑(Art of This Centrury Gallery)'을 개관했다. 그로부터 윌리엄 바지오츠, 알렉산더 칼더, 한스 호프만, 마크 로스코 등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면서 '뉴욕화파'의 시초를 열었고, 특히 '액션 페인팅' 아버지 잭슨 폴록을 발굴했다. 1, 2차 세계대전의 위협 속에서 유대인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귀중한 작품을 수집하고 작가들을 발굴할 수 있었던 뒷배경에는 그녀의 도전정신과 동료작가들의 우애가 있었다. 49세에 드디어 페기 여사는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 그리스관에 그간 모은 유수의 컬렉션을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30여 년간 베네치아에서 거주하다가 사후 컬렉션을 모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이관했다. 포지션으로 보면 패리스 힐튼, 지지 하디드나 켄달 제너 같은 다이아몬드 수저집 딸인데, 업적으로 보면 간송 전형필 선생에 버금간다. 간송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우리 보물을 지키기 위해 힘쓰셨는데, 페기 여사는 나치 치하에서 미술계의 원석을 보전해 주었다. 

창작에 집중했던 김환기 화백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적 측면에서 설명을 덧붙이고 대중에게 내보이면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주었던 사람은 배우자 김향안 여사였다. 영원히 알려지지 않고 묻힐 것 같았던 고흐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그가 쓴 편지들과 그림들을 씨실날실 엮어 사람들에게 내보인 제수 조안나 반 고흐가 있었다. 피카소나 베르나르 뷔페처럼 창작과 동시에 유행이 되어 큰 인기를 누리는 예술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세상에서의 쓸모나 가치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가 작품을 아무리 만들어내도 그것을 알리고 팔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만 작가의 자기만족을 넘어 인류 문화와 정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이 끊임없이 메세나에 투자하고 있고, 사회는 또 그걸 미덕이라고 하나 보다. 돈 없는 사람의 대표주자인 나는 돈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만 하는 게 전부인데, 돈 많은 사람들은 나름의 소명의식이 또 있나 보다. 

그나저나 패리스 힐튼은 이제 한물가서, 요새 젊은이들 중에는 거의 아는 이가 없는 것도 같다. 패리스 자체도 이제는 좀 조용히 살고 싶으려나. 




야간개장 때라서 오후 5시쯤 느지막하게 입장했더니 관람객이 별로 없다. 외진 곳에 있어 원래 별로 관람객이 없는 것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다음 날 낮에 집 밖 담장을 둘러 줄을 선 것을 보고 미리 다녀온 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명세에 맞게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잭슨 폴록, 앙리 무어 작품들이 많이 있었고, 콜더의 모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도 1점 있었다. 별관에서는 프랑스 특별전이 열렸는데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막시밀리안 루주 등의 작품이 있었다. 인상주의 그림은 비교적 최근이고 하도 많이 창작이 되었는지 유럽 어느 박물관에 가봐도 몇 점씩은 꼭 있는 느낌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앞쪽에 아카데미아 다리가 있다. 아카데미아 다리 중간에 오르니 저 멀린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정면에 보이고, 굽어진 대운하 양 옆으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열을 지어 서있다. 카날레토의 명화에서 많이 보던 아름다운 풍경이다. 카날레토는 이름부터 명실상부 운하의 화가이다. 본명조차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이다. 학생 시절 로마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평생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 구석구석의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그 아름다움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만 모아도 베네치아 전체 도시의 모습이 완성될 것 같다. 유명한 건물들과 풍경을 원근법에 따라 정확하게 묘사한다. 구도도 잘 선정해서 두칼레 궁전과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 성당 등 여러 명소를 한 장면에 모두 담아낸다. 카날레토가 그린 과거의 산마르코 광장으로부터 현대 광장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편안한 마음을 들게 한다.


이전 17화 평행우주로 이끄는 베네치아 골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