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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나 죽거든 산타크로체에 묻어주오

DAY 7 피렌체 시내 관광

베키오 궁전 바로 앞에 조각의 회랑이 있다. 작품들은 하나같이 약탈과 폭력에 관한 것이다. <메두사를 참수한 페르세우스>(벤베누토 첼리니), <사비나 여인의 약탈>(지암볼로냐), <켄타우로스를 때려잡는 헤라클레스>(지암볼로냐), <쓰러진 파트로클루스를 들고 있는 메넬라우스>(루도비코 살베티 복원), <폴리제냐의 약탈>(피오 페디). 인간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두 개만 넘으면 선과 악을 가르려고 하는 흑백논리, 나와 다른 것은 악이라는 자기 중심주의, 선인 내가 악인 타인을 바로잡고 계도해야 한다는 선민의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이어져 내려왔고 지금의 인간을 형성한 인류의 습관이다. 남을 해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우리는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은 역사가 극히 짧다. 사냥을 같이 해야 하는 무리의 개념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동료라는 개념은 이제 겨우 천 년 되었다. '친절이 승리한다. 함께 가야 오래간다.' 라며 디폴트값이 안정, 평화, 비폭력인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이 평화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꾸준히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과연 맞는지 항상 의심하는 자세, 자기 객관화, 중용, 절제, 이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권선징악일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투어 전까지 막간을 이용해 산타크로체 성당에 잠시 들렀다. 로마에서부터 성당이 보이면 크든 작든 내부는 어떨까 궁금함에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 보았었는데, 매번 들어가는 곳마다 '이 성당이 나의 최애성당이다!'하고 반하곤 했었다. 성당의 나라인 이탈리아라서 워낙 웅장하고 위대한 성당도 많이 있지만, 작은 동네성당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우아함이나 도도함이 드러나면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탈리아가 기본적으로 대리석 생산되는 나라이고 미적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서 작은 성당 하나하나까지 어여쁘게 잘 지을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재능 따라가기는 하지만 미적 감각 특히 디자인은 학습보다는 재능의 영역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인들의 피에는 다들 예술인의 유전자가 한 방울씩 들어있는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환경이 기본적으로 예술적이고 조화로운 것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생겨나는 것일까.

산타크로체 성당은 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특출 난 미인은 못 된다. 파사드는 단정하고 명랑하지만, 실내 장식은 거의 없으며 거칠고 투박하다. 하지만 입장하게 되면 본당 양측에서 성인과 위인들의 무덤이 죽 늘어서 있는 게 기분이 영 묘해진다. '피렌체 판테온'이라는 별명답게 단테,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등 역사적 인물들이 이곳을 자신의 묫자리로 점찍었다. 영험한 기운을 느낀 것인지, 전임자의 무덤을 보고 흠숭해서 같이 묻히고 싶었던 것인지 아무튼 소박한 성당치고 묫자리의 주인들을 보면 국립묘지 못지않다. 미사를 위해 만든 전당이라기보다는 공동묘지를 포장하기 위한 위장물인지 모르겠다. 유수의 위인들이 천하의 판테온을 두고 굳이 이 성당에 묻히기를 희망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나도 죽고 나서 이곳에 묻히고 싶은데.

두오모, 베키오 궁전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이다. 1294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본당으로 산타크로체 성당을 먼저 착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베키오 궁전을 건립했을 것이다. 성당은 1443년 봉헌 때까지 수차례 설계가 변경되었고, 말기에는 대가 브루넬레스키도 한몫 거들었다. 이 소박한 성당에 브루넬레스키까지 손을 댄 것을 보면 분명 이 땅에 어떤 힘이 서려있는 것이 틀림없다.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아리따움, 화려한 장식은 찾아볼 수 없고, 19세기에 흰색, 녹색의 대리석을 조합한 고딕풍 파사드를 건립하였다. 페루치가와 바르디가 예배당을 장식하는 조토의 <두 요한>과 <성 프란체스코> 벽화, 타데오 가디의 프레스코화, 도나텔로의 <십자가상>과 <수태고지>,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파치가의 예배당 등이 남아 있다. 1966년 대홍수로 수해를 입고 복구는 하였으나, 치마부에의 <십자가상>이 손상되었다.

성당을 나오니 수도원에 햇살이 가득하다. 아침에 속을 썩이던 안개가 말끔히 걷혔다. 하늘은 공활하고 구름은 높다. 좋은 날씨는 산해진미보다, 핫플 장소보다, 힙한 친구들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선사한다. 우피치 미술관에 갈 시간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중요한 작품이 많다고 들어, '피렌체 한 바퀴'의 가이드투어를 예약했다. 입장료 15유로와 투어비용 10유로였다. 가이드님께서 작품 설명과 더불어 그에 엮인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역사도 재미있게 풀어주셔서 보람찬 시간이었다.

이탈리아어로 '우피치(Uffizi)'는 사무실이라는 뜻이다. 1560년 코시모 1세가 초대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행정과 사법기관이 모두 입주할 수 있는 '정부종합청사'를 건립하도록 조르조 바사리에게 지시하였다. 이에 14년간 우피치 궁전을 건립하였다. 이후 15세기 코시모 일 베키오부터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잔 카스토네까지 약 200년간 메디치가가 수집 또는 제작 의뢰한 모든 작품들의 수장고가 되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과 같이 1737년 메디치의 마지막 자손 안나 마리아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2,500여 점의 컬렉션을 기증함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국립미술관으로 격상되었고, 일부 조각 등은 1800년 국립바르젤로미술관과 국립고고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바사리의 회랑'을 통해 베키오 궁전 및 피티 궁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랑에는 약 1킬로미터 길이에 걸쳐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어 세계 최장, 최고 수준이다. 

미술관 주요 작품으로는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봄, La Primavera)>(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예배>와 <수태고지>(레오나르도 다빈치), <성가족(Tondo Doni)>(미켈란젤로), <검은 방울새의 성모>와 <자화상>(라파엘로), <우르비노의 비너스>(티치아노), <성모자>(조토),  <수태고지>(마르티니), <바커스>(카라바조), <세 동방박사의 경배>(알브레히트 뒤러), <목자들의 예배>(휘스) 등이 있다.

보티첼리의 작품들은 명실상부 우피치 미술관의 마스코트이다. 무심하거나 강퍅해 보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물들, 우락부락한 미켈란젤로의 인물들, 갸륵해 보이는 라파엘로의 인물들에 비해, 나는 오히려 보티첼리의 아리따운 미인들이 마음에 든다. 대놓고 미를 과시하는 것이 꼭 미인대회를 연상케도 하지만, 실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하지 그걸 또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발그레한 볼이며, 단아하고 둥근 눈이며, 앵두처럼 볼그스레한 입술이 예쁘다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키도 늘씬늘씬하고 풍채도 아담하지도 않고 우람하지도 않은 것이 야리야리한 것도 아니고 탄력 있게 낭창하다. 모나리자보다도 모딜리아니보다도 '미인'의 정석이라면 자고로 보티첼리의 여성들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객나적인 평가인 것인지, 보티첼리 작품들 앞에는 항상 인파가 만선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이며,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라는 뜻으로 술을 좋아하는 성격을 짐작케 한다. 출생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보티첼리의 아버지가 보티첼리에게 금세공 훈련을 시켰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가 집안보다는 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베키오다리를 중심으로 귀금속업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그때 당시 '예술하면 배를 곯으니, 기술을 배워라!'라는 교훈이 널리 퍼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린 산드로는 금세공 훈련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 더 흥미를 느끼고 아버지를 설득한 결과 르네상스의 대가 프라 필리포 리피의 공방에 들어가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큰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뭐가 되었어도 되었을 사람인가 보다.

스승인 필리포 리피의 화풍은 형상을 힘찬 선으로 그리면서 치장을 중요시했는데, 보티첼리 그림에서도 일부 이러한 양상을 볼 수 있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약간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같아 보이는 이유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배경과 뚜렷한 경계를 이루는 윤곽선 때문인 것 같다. 필리포 리피, 보티첼리의 명맥을 알퐁소 무하가 이어간 것 같다. 

어쨌든 보티첼리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조각미술로부터 사실적인 묘사의 매력을 느껴 이를 차용하면서도, 사실의 단순한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장식적인 면과 상징성을 강조함에 따라 미술적 가치와 도상학적 가치를 모두 제고하였다. 보티첼리는 그림 속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알레고리)를 숨겨 놓았다.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는 이들은 점점 더 그의 그림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안젤로 폴리치아노가 쓴 시 <회전목마의 방>을 소재로 작품 <봄>을 창작했듯이 보티첼리의 그림은 '붓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그림에서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이면서도 배경이나 옷의 장식 등은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어, 보는 이들이 신화 속에 직접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보티첼리 그림의 배경이 되는 풍경은 황상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인물들은 생생하고 바로 앞에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에 보티첼리 자신도 그렇고 의뢰 들어온 주문 건도 그렇고 신화에서 소재를 얻는 창작이 많았나 보다. 풍경과 도상, 인물을 모두 꿰뚫는 지식과 안목이 있었던 보티첼리였기에 그런 그림이 가능했을 것이다. 완전히 현실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꿈 속에 나왔던 것 같은 장면. 

명성이 절정에 달할 때는 시스티나 성당의 측면 벽화도 작업했으나, 말년에 사보나롤라 혁명 시 그의 신봉자가 된 보티첼리는 급진적 사고에 빠져들어 이교도적 주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급변했다. 기존에 자신이 창작했던 누드화 등을 모두 죄악이라며 1497년 악명 높은 '허영의 소각' 동안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스스로의 선택이었는지 사보나롤라 세력의 강압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사보나롤라는 아주 죽일 놈이다. 이후 보티첼리는 신앙의 영광스러운 면에 집착하여 <신비의 십자가> 등을 남겼고, 죽기 직전까지 단테의 <신곡>에 어울리는 삽화를 그리는 작업에 전념했다.




<비너스의 탄생>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대적인 '여성미'를 그대로 구현해 냈다. 비너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바다에 빠지고 거기서 발생한 물거품에서 탄생한 여신이지만 이 그림에서 묘사된 상황은 비너스가 태어난 상황이 아니라 태어난 후에 키테라 섬으로 이동하는 장면으로서, 호메로스의 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너스가 조개를 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미의 여신을 진주에 비유한 것 아닐까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냥 파도를 헤치고 온 배였을 따름이다. 그림 왼쪽에서는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꽃의 님프 클로리스를 매단 채 입에서 꽃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해변으로 밀어보내고, 오른쪽에서는 봄의 여신 플로라가 데이지 등 봄꽃으로 장식된 가운을 펼치며 비너스를 환영하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비너스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미의 여신이라는 말 그대로 순수와 우아의 개념을 여실하게 시각화해주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가슴과 음부를 가리고 있어 정숙한 비너스(비너스 푸디카, venus pudika)라는 고전 조각의 특성을 따르고 있는데, 아마 당시 메디치가에 있던 <메디치가의 비너스> 조각과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의 작품 <물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에 대한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의 묘사 글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의 용도에 대하여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크고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실제 용도는 휴가용 별장에 그린 감상용으로서 타인에게 과시하기보다는 가문 주인의 개인적 감상과 정신적 명상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비교적 저렴하게 캔버스에 템페라화로 그려졌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또 메디치가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의뢰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쁜 날을 축하하든 어지러운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든 어느 측면으로나 볼 때 기분 좋은 용도로 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눈으로 아름다운 보면 정신도 아름다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당시 시대의 철학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대 플라톤의 '이상향' 개념을 계승한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비너스가 육체적 즉, 심미적 완성형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승리 또는 성공, 그가 도착한 키테라섬은 피렌체, 그를 반기는 플로라는 피렌체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프리마베라>는 시기적으로 <비너스의 탄생>에 근 10년 앞선다. 비너스의 탄생에 나온 인물들은 대부분 <프리마베라>에서 구상되었었다. <프리마베라>에서 비너스는 백색 드레스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머리 위에는 에로스를 달고 장면 정중앙에 서있다. 장면 오른쪽에 서풍 제피로스가 꽃의 님프 클로리스에게 꽃바람을 불어 봄의 여신 플로라로 변신시킨다. 이 인물들의 구도가 무언가 아쉬웠던 보티첼리가 10여 년 뒤 <비너스의 탄생>을 창작했나 보다. 한편 장면 왼쪽에는 새빨간 튜닉을 입은 헤르메스가 나무 이파리에 매달린 이슬을 떨어내고 있으며, 그 뒤로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3명의 미의 여신들이 춤을 추듯 손을 모으며 돌고 있다. 배경은 피렌체 인근 피에솔레 숲으로 울창한 나무들과 잔디밭 군데군데에 수줍은 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헤르메스, 은은한 아름다움의 상징 비너스, 꽃의 여신 플로라 등 봄이 연상되는 신화의 모든 인물을 한데 모아 놓았다. 이 기세대로라면 여름, 가을, 겨울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계절에 대한 작품은 없다. 

이 중 붉은 튜닉을 입은 헤르메스가 강한 인상에 비해 너무 장면 가장자리에 치우친 것 같아 아쉽다. 헤르메스를 따로 떼어 또 다른 그림을 창작했어도 좋았으련만 그런 건 그리지 않았나 보다. 다만 보티첼리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이 헤르메스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미켈란젤로가 초기에 작업한 <성가족>, 레오나르도의 역시나 미완성인 <히에로니무스 성인> 등 위인들이 창작한 어수룩한 시기의 작품과 같이 메디치의 안목이 아니면 현존하기 힘들었을 작품들도 수두룩하다. 메디치는 항상 칭송이나 찬사와 함께 감사의 대상이 된다.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의 옷주름과 결과 소재를 살리는 솜씨를 보면, 라파엘로가 왜 미켈란젤로를 잇는 후계라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러 대가가 각자의 시각을 담아낸 <수태고지>를 보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만 명이 있으면 만개의 눈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체감되었고,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직접 보니 취기가 돌았다. 3시간의 투어였지만 눈 깜짝할 새에 감동과 흥분만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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