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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열정과 냉정과 안개

DAY 7 피렌체 시내 관광

오늘은 피렌체 두오모를 정복할 것이다. 두오모의 원래 이름은 '꽃의 성모 마리아(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으로서, 리즈시절은 아마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열풍 때일 것이다. 소설과 영화 이후로 두오모를 찾은 일본인과 곁다리 한국인들이 한 1억 명은 되었으려나. 

두오모를 가까이서 보는 법은 2가지 경로가 있다. 두오모를 직접 오르거나,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 조토의 종탑에 올라 두오모를 조망하는 것이다. 두오모 쿠폴라는 계단 400개, 조토의 종탑은 계단 300개라고 하니, 가급적 시간과 체력을 안배해서 체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혹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직접 체험하기보다는 시각적 경험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조토의 종탑을 올라 두오모를 조망함으로써 피렌체 풍경의 백미를 맛보는 게 좋다. 게다가 두오모 쿠폴라는 <냉정과 열정 사이> 이후 수천만 커플의 망령이 살아 숨 쉬는 꺼림칙한 장소이기 때문에, 별로 발들이고 싶지 않다.




패기 넘치게 오전 8시에 조토의 종탑 입구에 줄을 섰다. 압도적 1등이다. 매표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테러리스트가 된 기분이다. 8시 20분경 아무도 오지 않길래 '종탑을 한번 돌아나 보고 올까.' 하고 다녀왔더니 그 사이 가족 한 팀이 1등을 차지했다. 나만의 '20분 천하'가 끝났다. 잠시 후 종탑 앞에서 기념품을 파는 좌판상이 좌판을 깐다. 아니, 깐다기보다는 날개를 펼친다. 좌판은 초고도 최첨단 진열 시스템이다. 기술의 발전은 소규모 좌판상에게까지 닿았다. 트럭에서 카트 같은 것을 내리더니 리모컨을 누르자 사방으로 날개가 펴지며 기념품을 전시할 수 있는 패널탑이 된다. 동영상을 찍고 싶었지만 영업방해가 될까 봐 소심하게 쳐다만 봤다. 

8시 30분이 되어 개표를 시작했다. 개찰구는 옛날 2호선 지하철 개찰구와 같다. 개찰구를 통과하자 신나는 계단 행진이다. 앞에 가던 가족 팀이 하나둘씩 나자빠졌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전망대 1등 입장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성모마리아는 질투가 많은 인간에게 행운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망대에는 짙은 안개가 뿌옇게 가득 차 있었다. 연무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나 홀로 서있으니 <미스트>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미지의 안갯속에서 징그러운 촉수가 뻗어 나오고, 나와 촉수를 가로막는 것은 허름한 철장살 한 줄 뿐인. 끔찍한 안개다. 아까 계단을 올라오면서 간간이 보이는 작은 창 밖으로 연무가 보이길래 '멜랑콜리한 두오모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며 흐뭇해했던 마음에 삽시간에 실망의 파도가 밀려왔다. 조토의 종탑이 두오모보다 서쪽에 있으니 '해가 보이면 두오모와 같이 멋지게 사진 한 컷에 담을 수 있겠다.'는 예측도 산산이 부서졌다. 두오모는커녕 동서남북 방향조차 감지하기 힘들었고, 이따금씩 안개가 짙어지면 뻗은 내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예져서 오히려 신기했다. 이 정도면 <무진기행>에 버금가려나. 9시 정도 되자 상대편 두오모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곳 쿠폴라에서도 오밀조밀 움직이는 관람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끼리도 안개에 당황하여 웅성웅성 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불굴의 한국인으로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서 기어코 두오모 전경을 한 컷 남기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뜬 줄 모르게 해는 떠버렸고, 일광 속에서도 두오모는 뿌연 안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꽝 복권을 들고 일주일 기다린 기분이다. 남들은 다 찍은 쨍하고 빨간 두오모 사진이 나에게는 없다. 나만 없다.

 



10시경 조토의 종탑에서 내려와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두오모의 파사드(facade)는 백색 대리석 바탕에 분홍색과 녹색의 줄무늬로 장식되어 화창하게 개화한 꽃을 연상케 하며, 자애롭고 온화한 성모 마리아의 성당이라는 수식어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성당은 파사드만 떼어내 보면 오밀조밀 여성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거대하게 박혀있는 쿠폴라로 인해 순식간에 우람한 기운을 내뿜는다. 중세성당으로서는 유럽 최대규모이고, 현재도 베드로 대성당, 세인트폴 대성당 등과 더불어 크기로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외유내강이랄까. 앞에서 봤을 때는 야리야리한 소녀였는데, 뒤로 돌아가니 건장한 근육맨이다. 부조화에서 기인한 재치로 인해 두오모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두오모와 사랑에 빠지게 한다. 

외벽의 줄무늬를 이루는 색깔별 대리석은 각기 다른 인근 지방, 카라라(하얀색), 프라토(초록색), 시에나(분홍색), 라벤차 등에서 가져온 것으로, 성당을 지을 때 얼마나 대단한 정성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이 대리석으로 성당과 세트인 조토의 종탑과 산조반니세례당도 마감했으니 당시 피렌체 사람들의 정성과 미적 감각, 부를 한 번에 보여주는 보석세트라 할 만하다. 성당 정당 오른편의 조토의 종탑도 같은 무늬로 마감되어 통일감과 함께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아기자기한 귀여움을 자아낸다. 두오모 정문의 바로 맞은편에 팔각형 건물 산조반니 세례당이 두오모를 등지고 앉아 있고, 두오모 반대편에 로렌초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이 위용을 자랑한다.

오모의 거대한 쿠폴라는 아르놀포 캄비오가 1296년 설계를 했지만 시공할 기술이 없어 미루어 두었다가 1436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달성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에서 이중벽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판테온과 같은 원형이 아닌 팔각형 받침 위에 돔을 올리는 형태로 거대한 쿠폴라를 안착시켰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은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진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고 오늘날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두오모의 돔보다 큰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건립한 것이 브루넬레스키보다 150년이나 늦은 시기였으니, 브루넬레스키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케 한다. 건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눈부신 활약을 한 브루넬레스키는 이제 두오모 옆 카노니치 궁전 벽감에 앉아 자신의 작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화려한 외관과 대비하여 두오모 본당 내부는 상대적으로 소박한 편이다. 천장화나 벽화 등은 거의 없고, 위압적인 기둥들과 궁륭을 가로지르는 늑골이 퉁명스럽게 관람객들을 반긴다. 성당 입구부터 중앙통로를 따라가는 모든 길은 쿠폴라 천장을 장식한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의 <최후의 심판>을 돋보이게 하는 빌드업 과정이다. 무미건조한 통로를 따라가다가 원형의 중앙 부분에 이르러 고개를 들면 층층의 구름 위를 떠올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입체감이 생생해서 진짜 하늘이 보이는 것 같다. 원래 블루넬레스키 생전에 돔 천장은 환한 빛이 반사되도록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하려고 했으나, 죽고 나서 한동안 비워져 있었다. 이후 코시모 1세 때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채우기로 했다. 그림은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한 묵시록 4장의 장로 24명',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 없는 행복', '중대한 죄와 지옥'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 있다.

본당의 정문 위쪽에 바늘이 하나뿐인 거대한 시계가 있다. 네 모서리는 복음서를 남긴 4명의 사도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초상화로 장식되어 있고, 하나뿐인 바늘은 24시간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 위쪽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에는 가도 기디가 작업한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그리스도>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두오모 내부는 성당 본당이라 입장료를 받지 않지만, 두오모 쿠폴라, 조토의 종탑, 산조반니세례당 그리고 성당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는 통합권이 10유로이다. 

성당 본당 입장료를 받지 않는 건 개별성당마다 다른 지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돈에 환장한 앵글로색슨들은 성당이고 학교고 입구만 있으면 다 매표소로 생각해서, 런던 세인트폴 성당에도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책정해 놨다. 이런 사람들이 박물관은 공짜라 하니, 신기하다. 빈자를 사랑하는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의 사람들은 과거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뒤엎으셨듯이 미사의 전당에 돈을 매긴다는 것은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위대하고 장엄한 성당들의 문이 거의 예외 없이 밀면 열린다. 비렁뱅이나 광인이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경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관용이 있다. 아무튼 두오모 통합티켓은 인터넷예매나 현장구매나 가격도 똑같고, 인터넷예매라고 해서 대기를 따로 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현장구매는 기다란 줄을 2번 서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커피 본고장에서의 하루하루가 아깝지 않게 에스프레소와 티라미수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1시경 베키오 궁전으로 향했다. 어제 들은 대로 탑과 박물관 통합티켓을 14유로에 끊고 바로 탑으로 향했다. 어제 보슬비로 폐쇄했던 탑을 오늘은 개방했다. 사람들이 계단까지 내려와 줄 서고 있었다. 탑에는 일정한 인원만 올려 보내기 때문에, 탑에서 누가 퇴장하지 않으면 밑에서 올라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줄은 줄어들지 않고 검표원은 한가해 보였다. 나는 오후 3시에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예약해 놓은 참이어서 혼자서 속을 태우고 있었다. 혼자 왔으니 혹시나 1인분이 남으면 올려보내 주기를 간곡히 청하는 눈빛을 쏘아봤지만, 얄짤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앞에서 커플 2명이 올라갈 차례였는데, 검표원이 나를 보더니 "혼자 세요(Only one)?"하고 묻길래 세차게 "예스!"라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올려보내 주었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안내원이 "거의 다 왔어요.(You're almost there.)"라며 하산객들이 으레 던지는 무의미한 격려를 보내길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올라갔다. 오전에 300개의 종탑을 등반하고서 오후에 또다시 등반을 하려니 토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직전에 꼭대기에 도착했다. 날이 개긴 했지만 여전히 구름은 떠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처럼 붉은 지붕 바다 위에 섬처럼 오뚝 솟은 두오모가, 이번에는 더 크게 보였다. 두오모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라는 말을 들었는데, 과연 명실상부하다. 공화국의 통치자가 두오모를 보기 위해 고안한 설계일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 액자였다. 




베키오 궁전은 1299년 피렌체 시의회 의뢰로 시뇨리아(Signoria) 궁전 즉, '시청사'로 개청한 이래, 수백 년간 청사로 사용되었다. 아직도 시의회와 시장실 등 일부 관공서가 입주해 있다. 메디치 시절 몇십 년을 제외하고 그 긴 기간을 일개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라 공무원들의 직장으로 쓴 것이다. 사무실과 복도는 명화로 가득 차 있고 바람 쐬러 올라가는 옥상 루프탑은 두오모뷰라니, 애사심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1540년 코시모 1세가 메디치 궁전에서 시뇨리아 궁전으로 이주했다. 이후 다시 아르노강 건너 피티 궁전으로 이주하면서, 시뇨리아 궁전은 베키오 궁전으로 바꾸어 불렸다. 재임기간 동안 공관을 2번이나 이전한 코시모 대공이 참으로 피곤한 보스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꼭대기 시계탑은 94미터에 이른다. 아로놀포 캄비오가 고대의 탑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탑을 설계하였으며, 이 때문에 중앙이 아닌 약간 왼쪽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고 한다. 고대에는 적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탑은 과거 감옥을 역할도 해서 국부 코시모도 감금된 적이 있고, 사보나롤라도 감금된 적이 있다. 정적이 번갈아 돌아가며 갇힌 감옥이라니. 시계탑에 박혀 있는 시계는 최초 1353년 니콜로 베르나르도가 제작하였다가, 이후 1667년 독일 게오르크 레더레가 만든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베키오 궁전 박물관 가장 높은 3층부터 관람하면서 내려왔다. 3층 전시실에 입장했는데, 초장부터 도나텔로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디트>가 나와 깜짝 놀라였다. 기를란다요의 <로마영웅> 프레스코화, 엘레오노라 예배당을 장식한 안젤로 디 코시모 알로리의 프레스코화, 마키아벨리의 흉상과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서재 등 보물창고이다. 




2층 관람을 마치고 건물 반대편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로 나왔는데 거대한 강당이 있다. 천장은 물론 양 벽에 르네상스 명화가 가득하고, 바닥도 복잡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가운데 양 벽에 입이 떡 벌어지는 조각상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다.

혁명군 사보나롤라는 메디치를 축출하고 시청을 차지한 이후, 1494년 시모네 폴라이올로에게 의뢰하여 가로 23미터, 세로 52미터의 대형 평의회 회의실 '500인의 방(살로네 데이 친퀘첸토, Salone dei cinquecento)'을 건립하였다. 회의실 양쪽 벽을 두고 역사상 천재들 간의 경합, 피렌체더비가 시작되었다. 한쪽 벽에는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Battle of Cascina)>, 반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앙기아리 전투(Battle of Anghiari)>를 그릴 예정이었다. 카시나 전투는 피렌체가 피사를, 앙기아리 전투에서는 피렌체가 밀라노를 물리친 승전의 기념사이다. 우리도 인천상륙작전, 지평리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등 그릴 것이 차고 넘치는데. 아무튼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먼저 의뢰를 받아 이미 프레스코화 작업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 뜨거운 숯과 화로로 빨리 건조하려는 과정에서 왁스가 녹아내려 험난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 초안을 구상하다가 바티칸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영묘를 건립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옳다쿠나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 손대는 것마다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말 몇 마리 궁둥이만 그려놓은 채 스리슬쩍 떠나버린다. 그렇게 미완성으로 덜렁 남겨진 방을 보고서 코시모 1세가 이주하면서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다. 조르조 바사리에게 의뢰하여 개축을 하고 양쪽 벽을 메디치의 전투, 피사와 시에나를 물리치는 피렌체로 장식하였다. 애초 레오나르도가 남긴 말 그림을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던 바사리가 결국 자기 그림으로 레오나르도의 명화를 덮어버렸던 것이다. 반전 결말이다.




베키오 궁전 지상층까지 내려오니 개방감과 폐쇄감이 동시에 드는 중정이 나온다.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을 소재로 벽화를 그려 채워 넣었고, 가운데 분수에는 돌고래와 놀고 있는 어린이 동상을 세워 아기자기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한옥의 마당도 그렇고, 이탈리아의 중정도 그렇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어쩔 수 없이 야외 난장이 아니라 안식처, 피난처를 찾아 들어올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안과 밖을 가르는 차별적 행위라 할 수 도 있겠지만, 인간의 본능이 이런 걸 찾는 것 같다. 햇볕이 들어오되 건물로 둘러싸인 공간은 누구에게나 편안함, 안정감을 준다. 맹수가 나를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공간만 들어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안심이 된다.

궁전 입구 왼편에는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모작이, 오른편에는 바초 반디넬리의 <카쿠스를 혼내는 헤라클레스>가 근엄하게 서서 진상민원인을 심판하려 하는 듯하다. 우리도 구청과 동사무소에 청원경찰을 배치해야 하는데, 그 많던 세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미켈란젤로는 애초 <다비드>를 건물 꼭대기에 설치하도록 요구했었다. 시청과 계약할 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최초 계약 때 합의하지 않은 것이라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그깟 동상 하나 어디에 놓든 무슨 상관이며, 그 무거운 동상을 어떻게 건물 꼭대기에 놓으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미켈란젤로는 건물 꼭대기에 있을 <다비드>를 상상하며 일부러 머리크기를 정상보다 크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누가 아는가. 자기가 만들어놓고 나중에 합리화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요새도 도시개발할 때 어느 규모의 구역에는 의무적으로 예술작품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게 다 세금 살살 녹이는 짓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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