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대협 May 23. 2024

좋은 것은 역시 크게 봐야 제 맛

DAY 5 피렌체 도착

레푸블리카(Republica) 광장에 있는 유명한 질리(Gilli) 카페에서 커피와 티라미수를 시켰다. 1유로 에스프레소와 1.5유로 티라미수인데, 역시 둘 다 본고장에서 먹으니 확연히 수준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자부심을 인정해 주어야겠다. 다만 이탈리아의 카페들은 기본적으로 스탠딩으로 먹고, 자리에 앉으면 자릿세를 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 카페는 우리처럼 사랑방 같은 역할이 아니라 가판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카페란 자고로 식욕을 해소하는 곳이 아니라 수다욕구를 해소하는 곳인데 이탈리아 카페에서는 어지간한 다리 근력이 아니고서는 용건만 간단히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탈리아 커피집이 근본이네, 아니네, 장사를 잘하네, 잘못하네 하기도 무엇하다. 커피는 이탈리아가 본고장, 사실은 본고장도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를 대중화시킨 것은 이탈리아이니 그 명색은 인정한다 쳐서 이탈리아가 본고장이라고 하나, 카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가 본고장으로서 커피와 카페 개념 사이에 간극이 꽤 있으니 커피 마시는 곳이 곧 카페라고는 할 수 없을 것도 같다. 한국은 이미 카페가 수다방을 넘어 독서실로 활용되고 있고, 노트북을 펼치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 당연하다. 정통 이탈리아 커피집 사장님이 와서 보면 "아이고, 두야!" 하면서 뒷골을 잡을 것 같다.




조각의 회랑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를 돌고 있으니 빗줄기가 굵어진다. 서 있던 줄 알았던 동상이 움직이듯 온 줄도 모르게 베키오 광장에 우산장수가 등장했길래 우산 하나 달라고 했다. 중국산인데 5유로는 좀 비싼 것 아닌가 구시렁 대고 있는데, 뒤에서 흘끔흘끔 보시던 중국 아줌마들께서 물으신다. "얼마래요? 어디 건데요?" "5유로인데 중국산이래요." "아니네. PRC라는데." "아, PRC란 People's Republic of China(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뜻입니다." Made in China는 효력이 다 해서 이제 Made in PRC를 쓰기로 했나 보다. 5유로 주고 산 우산은 10분 정도 쓰고 산타크로체 성당에 갔더니 우산꼭지가 톡 떨어졌다. 그리고 한창 비가 몰아치던 그날 밤 수명을 다 했다. 머리를 감싸는 비닐캡에 대해 5유로를 주고 산 것은 조금 비싸기도 했던 것 같다.

인근 '옐로 바' 식당에서 마르게리따와 풍기 피자를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이탈리아 음식은 대충 만들어도 맛있는 것 같다. 피렌체가 있는 지역 토스카나는 고기가 아주 맛있고, 피렌체에도 스테이크 맛집이 많다고 했지만 나는 굳이 스테이크를 먹지 않아도 피자나 티라미수만으로 이탈리아가 미식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 3대 미식에 프랑스, 중국 등을 꼽지만 내 생각에는 이탈리아(피자, 파스타, 커피), 미국(버거)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프로 미식가들이 꼽기에는 희귀한 재료,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린 기술, 적절한 간, 아름다운 플레이팅 등 여러 요건을 고려해서 미식을 꼽는다고 하겠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할 때 전 세계 어느 문화 사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만큼 음식의 중요한 요건이 있을까 싶다. 그 결론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고 그 나라 사람들도 자주 들러서 먹을 의향이 있는 음식이 곧 미식이다라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맛없게 느끼는 음식은 다양하겠지만, 맛있는 음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진다. 맥도널드,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 같이 말이다.




베키오 다리까지 갔는데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베키오 다리의 상점들은 다 문을 닫았다. 보석상점이라 그런지 절도 방지를 위해 하나같이 나무나 철창으로 앞을 막아놓았고, 그 가운데만 조그맣게 창문을 뚫어놔서 가게 안쪽 보석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탈리아어 '베키오(vecchio)'는 '오래된'이라는 뜻이다. 베키오 궁전은 구궁전, 베키오 다리는 구다리인 셈이다. 베키오 다리가 아마 아르노강에 걸친 최초의 다리였을 것이다. 과거 피렌체에서는 육지에만 세금을 매겼기 때문에, 강 위(다리)에 슈퍼마켓과 푸줏간을 비롯하여 비과세 상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리하여 베키오 다리는 서민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아르노강 이 편에는 베키오 궁전이 있었고 저 편에는 피티 궁전이 있었는데, 궁전의 주인 코시모 1세는 두 궁전 사이를 왕래할 때 서민들을 마주치기 싫었다.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는지, 사보나롤라 반란의 교훈으로 민중에 회의감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코시모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서민들과 섞이지 않게 궁전을 왕래할 수 있도록 주문했고 이에 바사리가 베키오 다리 위로 또 다른 다리 '바사리 회랑(코리도리오 바사리아노)'을 건설한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코시모 1세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베키오 다리의 푸줏간들을 폐쇄해 버렸고, 그러자 그 자리에는 귀금속 세공점들이 입점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귀금속 거리로 이어져 오고 있다.




다리 중간에 피렌체 출신 금 세공사 벤베누토 첼리니의 기념비가 있는데, 커플이 그 주변 울타리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강에 던져 버리면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이건 아마 울타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커플들의 비뚤어진 욕망 외에도 베키오 다리가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 자물쇠는 전 세계를 통틀어 사랑의 상징이 되었나 궁금하다. 철창만 있으면 자물쇠를 못 달아 안달이라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 그럴싸한 곳에 자물쇠를 달아 사랑의 명소로 선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해관계자들에게 뒷돈을 받고 말이다. 

여담으로 벤베누토 첼리니의 본업은 금세공이 아니라, 왕은 물론 교황도 사랑한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로지아 데이 란치에 있던 <메두사를 참수한 페르세우스>가 그의 위대한 작품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궁정 음악가로서 플루트를 연주했으며, 군인으로서 적장인 부르봉 공작을 사살했다. 이 정도면 탈휴먼급의 다각적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여기에 덧붙여 형제에 대한 복수로 사람을 죽인 데다가,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면서도 남색까지 밝혔다. 현대사회에 태어나서 부캐 부자로 유튜브를 찍었어야 하는 인재다. 말년에는 결국 종교의 길로 들어서나 이 또한 연막이었고, 수도사 서약을 파기한 후 자서전을 써서 자비로 출간했다. 아무래도 관종이 조용히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의 장례식에는 온갖 유명인사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쳐댔다고 한다. 이게 과연 한 명의 인간이 다 소화할 수 있는 인생의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덕인지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을 정도이다. 베키오 다리의 보석상점들마다 '첼리니 골드'라고 슬로건을 내걸었던데 첼리니를 추모해서 그런가 보다.

피렌체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는 없었는데, 다행히 베키오 다리 폭파는 면했다. 패색이 짙은 추축국군이 피렌체에서 퇴각할 때, 다른 모든 다리를 파괴했지만 베키오 다리만큼은 보존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미대 지망생의 남다른 예술감각으로 보기에도 다리가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 앞까지 간다. 피티 궁전은 메디치가의 아성에 도전하던 피티가의 저택이다. 아까 보았던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이 건립되는 것을 보면서 루카 피티가 그 위세를 꺾으려고 1448년 의뢰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거절당했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피티 궁전의 외양을 보면 역시나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브루넬레스키 스타일이 아니다. 공사가 브루넬레스키 사후 12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고 하니, 실제 시공 책임은 브루넬레스키의 제자 루카 판첼리였던 것 같다. 루카 피티는 공사 말년에 재정 위기에 봉착했고, 궁전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공교롭게도 궁전은 1549년 메디치가에 매각되었다. 새로운 안주인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는 토스카나의 대공비이자 코시모 1세의 아내였다. 메디치가는 도전자의 콧대를 꺾어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초 궁전의 크기는 현재보다 꽤 작았으나, 코시모 1세가 새롭게 입주한 이후 수차례 증개축을 통해 규모를 키웠다.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였던 한때, 로레인(Lorraine) 왕조나 사보이아(Savoia) 왕조의 궁전으로도 사용되었을 정도이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은 직육면체 입방체 모양인데, 피티 궁전은 기다란 육면체 건물에 양쪽으로 스테이플러 침 모양 같은 날개가 붙어 있다.




피티 궁전 앞까지 가서 가죽가게에서 연두색 지갑을 하나 집었더니, 주인아줌마가 26.4유로를 부르셨다. 소수점까지 매길 정도로 정가를 치밀하게 책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흥정을 시도했다. "사장님,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니, 자비를 베풀어 깎아주세요." "그래! 난 관대하다!" 그래서 25유로에 샀다. 정가를 소수점까지 매긴 이유는 아무래도 1유로만 깎기에는 쩨쩨해 보여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1.4유로에 자존심을 팔라면 팔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의 야경 조망 필수 장소라는 미켈란젤로 광장 언덕에 올랐다. 버스로도 올라갈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패기가 넘쳐서인지 걸어 올라갔는데 패기가 넘치려면 체력도 같이 넘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잘 맞춰서 석양까지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오늘은 날도 흐리고 너무 천천히 걸어오다 보니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아르노강에 비치는 저녁놀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좋지 않은 날씨에 늑장까지 부린 것이 아쉽다. 비 온 뒤 날이 꽤 추워서인지 버스킹 하는 사람도 없고 간간히 연인들만 부둥켜안고 별이 한두 개씩 뜨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에서 보는 피렌체의 야경은 가슴을 가득 채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잔잔히 이는 붉은 지붕의 물결 위로 꽃봉오리 같은 두오모가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언덕이 피렌체 중앙으로부터 꽤 먼 거리인데 여기서도 두오모는 저렇게 큼직하게 보이다니, 명색이 두오모의 도시일만 했다. 현대인들이야 건축술이 워낙 발달해서 80층이네 100층이네 서로 마천루를 경쟁시켜 대지만, 그 옛날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로 웅장하게 서 있는 두오모를 완공시켰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을 남쪽 언덕에서 저 멀리 보이는 자기들의 성당을 보며 속된 말로 가슴이 뻐렁치지 않고서야 참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 경쟁하던 시에나, 페라라 같은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이리 와 봐라, 좋은 것 보여줄 테니." 하고서 이 언덕에서 저 두오모를 보여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얼마나 오졌을까. 위대한 것을 창작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다 만들고 나서 느끼는 기쁨에 대한 기대는 고통을 잠재워주는 마약 같은 것이다. 창작의 고통, 창작의 희열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서 파는 커피슬러시를 먹었다. 얼음 슬러시가 아니고 커피맛 나는 크림 같은 음료인데, 맛은 있었지만 스타벅스 톨사이즈보다 적은 양에 4유로라니 비싸게 느껴졌다. 1달러 에스프레소의 나라에서 4달러 슈퍼 커피를 먹었다.

이전 12화 각성한 갑부는 얼마나 강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