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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협 May 23. 2024

프롤로그

이 책에서 나는 영국 코벤트리에서 홀로 배낭여행을 출발하여,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를 여행하고, 프랑스로 넘어가 니스, 마르세유를 경유해서 리옹에서 여정을 마치고 코벤트리로 돌아온다. 15박 16일간의 일정이었으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크리스마스를, 프랑스 니스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의 주목적은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니스에서 멋진 일출을 보는 것이었는데 여행이 끝난 지금 결론을 말하자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행의 과정들은 값지고 알찼으며 매우 만족스럽다. 이따금 혼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민망하고 의기소침해졌으나 슬프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여행이 이미 동반자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의 거의 모든 활동은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어 시작했던 것 같다. '중독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의 금단현상을 이해하려면 변의를 참아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설명처럼, 변의처럼 참을 수 없는 욕구가 가득 찬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빼먹지 않고 일기를 잘 써서 칭찬도 받았다. 주제가 없는 날에는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아침을 먹고, 몇 시에 점심을 먹었는지라도 썼다. 이순신 장군도 하다못해 '출근해서 점검했다.' 하고 끝마치신 날도 있지 않은가. 쓰기 싫은 날이 더 많은 게 당연했겠지만,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연필을 쥐고 무엇이라도 끄적이고 싶어 쓴 기억이 많다. 

나이가 들면서 연필보다 자판을 더 많이 쥐게 되고, 공책보다 스마트폰을 더 많이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일기 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제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날 혹은 기쁜 날 혹은 슬픈 날이 아니고서는 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내가 무언가를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안온하게 지낸 날이다. 나이가 들고 감각이 둔해지면서 큰 일도 작은 일처럼 느껴지고 죽지만 않으면 무사히 평온하게 지냈다고 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일기 쓰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욕구에 의해서만 쓴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써야지.’하고 다짐하고서는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목차와 개요, 줄거리 등 체계적인 계획을 잡아 놓고서는 그 목차를 채울 수가 없다.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플롯을 짜거나 목차를 잡을 수는 있으나, 사이사이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없다. 평소 할 말 없이 사는 것 같다. 그러다가, 그냥 하루하루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욕구 없이 살다가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하고 폭소든 울화든 뭐가 터져야 비로소 쓰게 된다. 나는 죽었다가 깨나도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은 못 된다.

이 책은 10년이 지난 먼 옛날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여행을 다니면서 모아 두었던 일지이다. 그날그날의 경로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남기고, 집에 와서는 블로그에 옮겨 담았었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 정리되지 않은 순서로 마땅한 체계 없이 '게시글'로 쌓아만 두었었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하고 마음만 먹은 지 어언 10년이다.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를 이제야 모은 것은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쌓아둔 채 정리하지 않는 건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한데 모아 완성된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서는 이 찜찜한 기분을 해소할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쌀을 씻기로 했다.

여행일지를 쓸 때는 할 말이 많은 날은 주저리주저리 주체 못 하고 철철 넘치게 쓰다가 또 할 말이 없는 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두 마디하고 뚝 끊어버렸다. 쓸 때는 모른다. 대충 자판을 두들겨 휘갈기고 엔터를 쳐버리고 스마트폰을 닫아버리면 기분이 좋으니까 말이다. 그 뒤에 그걸 삭제하든 지지고 볶아 먹든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흥이 올라 미친 속도로 글을 써내려 갈 때는 '가자, 가즈아! 이대로라면 오늘 한 권 나온다!' 하다가도 다음 날 다시 보면 한숨이 나온다. "사방에 석유 냄새가 진동한다."(<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그리고 나는 지금 정화작업을 하고 있다. 세상 그 누구도 하기 힘들다는' 자기가 생산한 오물을 자기가 치우기'를 하려고 한다. 다름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고 맡겨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이 오물을 쓸어 담고 잘 포장해서 장식장에 올려둘 것이다. 오물이 그냥 흘러가게 놔둬도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겠다. 나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오물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는 유아적 행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노력을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여행 다니면서 제멋대로 지껄여 놓았던 기록들을 나름 잇고 붙이고 떼어 조절하면서 현장에 있는 생생함을 최대한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책이나 인터넷에서 주워 읽고 들은 것을 쌓고, 현장에서 발견한 것을 덧붙이면서 그래도 멀쩡한 기록이 되도록 노력했다. 나는 무엇이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도 중요하다고 보아, 지식보다는 감정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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