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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름배우사랑 Nov 12. 2020

<험프리 보가트>

Humphrey Bogart. 1899.12.15 ~ 1957. 1.14


 

동상을 사려고 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한 그런 동상 말이다. 그런데 동상이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광화문 앞에 있는 크기의 큰 동상 말고, 책상 위에 안착시킬 수 있을 법한 ‘내 옆에 두려는 크기’의 동상.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뭘 살까 고민하고, 난 이걸 반드시 사겠다는 고민과 동시에 금전적 여유와 그 물건의 가격을 생각하다 보면 내가 뭘 사려했는지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런 식으로 난 그 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그 사람, 영화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사람을 내 곁에 어떤 상징적인 구조로서 두고 싶었다. 그 동상의 주인공은 험프리 보가트다.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처음 본 그의 이미지는 그냥 거지였다. 거지 선장. 어떻게 이런 얼굴로 주연을 맡을 수 있었지?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굵은 선을 갖고 있는 배우였다. 그러다가 그의 다른 영화 세계를 여행한 후 자리 잡아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어쩜 이렇게 거지 같은 캐릭터를 독불장군처럼 그리고 로맨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대단함이 떠오른다. 당연한 거지, 험프리 보가트는 <아프리카의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니까.


 



어느 영화를 거론해도 유명하지만 특히 그는 Badass 타입의 캐릭터(내 식대로 풀이하자면 ‘어쩌라고 주의’를 갖고 있는 캐릭터다. 내가 명확한 판단이 서기까지는 내 맘대로 할 거야라는, 적어도 그의 영화에서)로 존재하는 사설탐정의 역할이 특히나 유명하다. 그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에 나오는 ‘필립 말로’와 대실 해밋이라는 작가의 '샘 스페이드' 역할 등 많은 탐정 역할을 맡았는데 셜록 홈즈 이상으로 유명한 캐릭터다. 그 소설들을 다 보진 못했고 심지어 그 소설을 소개해준 게 험프리 보가트라고 하는 게 맞겠다. 소설 속에서 그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 성격 묘사가 되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내가 책을 보게 돼서 설령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그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영화와 다르다 해도 나는 왜 책이 험프리 보가트를 표현하지 못했냐며 심드렁해할 것이다. 소설이 영화로 옮겨졌을 때의 만족감을 채우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영화들 안에서 그의 매력은 속사포처럼 내뱉는 그의 말투다. 그가 상대를 교란하고, 당황시키고 무력화시키기 위할 때쯤에 하는 그 대사들은 튀어나옴과 동시에 분위기를 냉전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차가움과 동시에 뜨거운 흥분을 담고 있는 그의 언변. 그의 대사가 끝난 후, 상대 배우들의 표정 쇼트들로 짧은 단편 하나 정도는 나올 것이다. 당황스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말대꾸를 할 수 없는 그들의 표정. 또 다른 놀라운 점은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 대사들이 매끄럽고 정확하게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받아 적으라고 하면 할 수 없겠지만 단어가 뭉개진다는 건 알 수 있다) 물론 촬영을 진행하며 발음이 꼬일 때도 있고 호흡이 꼬일 때도 있겠지만 영화에서는 치명적으로 그 자신의 말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정확하다. 나는 이 매력적인 호흡을 갖춘 화술을 연기하면서 쓰겠다고 늘 준비하고 있었고, 사용해봤지만 들려오는 코멘트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발음이 뭉개진다, 너무 빠르다, 등 적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연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내 것과는 다른 화술이었다. 굳이 변론을 하자면 한국의 발음 체계와 맞지 않는 화술일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부러워서 갖고 싶던 그의 화술 체계였다.      



부러운 건 아직도 많다. 패션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특히 여러 남성들의 워너비인 트렌치코트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하물며 그는 촬영할 때 거의 본인의 옷을 가져와서 의상 제작팀에서 매우 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사블랑카>에서 그가 입은 코트가 버버리 제품인지 아쿠아스큐텀 제품인지에 대해서 엄청나고 긴 논란이 이어졌었는데 그의 아들이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코트는 아쿠아스큐텀이라고 밝히면서 논란을 종식시킨지는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그의 코트에 굉장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주변 지인들은 모두가 알정도로 내 패션 센스는 형편없는데 난 험프리 보가트의 패션에 굉장한 동경을 갖고 있다. 과연 내가 그의 차림새를 따라 하게 된다면 잘 어울리는 멋진 남자로 남게 될지 아니면 코스튬 플레이어가 될지는 입어봐야 될 문제지만 내가 생각해도 나는 후자 쪽이 될 거 같다.




    

또 하나, 그가 가지고 있는 술에 대한 세계관이다. 그는 정말 진저리 칠 정도로 술독에 빠져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위스키를 떠올리면 험프리 보가트가 떠오를 정도니까. 어느 정도냐면 하루는 그가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고 들어오자 그의 아내 ‘로렌 바콜’이 “Goddamn Rat Pack!”(“젠장, 쥐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소리쳤다가 술을 같이 마시는 친구 모임 ‘랫 팩’이 결성됐다고 한다. 나는 이 일화를 처음 발견했을 때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술을 정말 못할뿐더러 술을 못하니 모임도 적은 삶이다. 그래서 랫 팩이라는 모임을 알게 된 후에는 꼭 랫 팩스럽게 술을 마시진 않더라도 가벼운 술 모임을 결성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됐었다. 수많은 고전 배우들을 떠올리다 보면 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술만큼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애주가인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중에도 독한 술만 마시는 사람들이었느니 따라갈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어느 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술은 언젠가 한 번 꼭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다. 내겐 술맛이 거기서 거기인데도 말이다.    

 


                          (맨 좌측이 험프리 보가트다.)



그리고 그는 담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이건 부럽다기보다는 어떤 로망에 가깝다. ‘험프리 보가트처럼 담배를 필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은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하게 된다. 앞서 말했던 술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면 손가락에는 반드시 담배가 존재한다. 내가 사려했던 동상의 손에도 담배가 꽂혀 있을 정도다. 아마 험프리 보가트를 아는 남자들은 그처럼 담배를 피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을 것이다. 특히 손에 물려있지 않고 입을 앙 다문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의 표정과 턱관절은 예술적이다. 하지만 그의 사망 원인은 후두암이었다. 술을 마시는 만큼 골초였다. 술이 그를 먹었고 담배가 그를 삼켰다. 예술을 하려면 술과 담배는 꼭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하고 떠난 것이었다.   


   

우습게도, 한편으로는 다행일 정도로 그와 나는 닮은 게 한 개도 없다. 심지어 조금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하고 갔다. 부러움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정확한 거 같다. 내가 못하는 걸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행하고 있을 때. 하지만 부러움을 넘어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그의 것은 "Here's looking at you, Kid" 국내에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이 대사를 널리 알린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카사블랑카> 촬영 중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포커를 알려주다가 즉흥대사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문장은 돈을 훔쳐갈 때나 게임 중 속임수를 쓸 때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아마 그녀와 포커를 하며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으로 던져진 말이었을 것이다. 직역을 하나 의역을 하나 분명 ‘험프리 보가트’에게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정말 거칠고 날카로운 터프가이였고, 삶에서 누구보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한 뜨거운 사나이였다. 아, 나와 키는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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