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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름배우사랑 Dec 05. 2020

<로렌 바콜>

Lauren Bacall. 1924.9.16 ~ 2014.8.12

누구나 자기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하나쯤은 있을 거다. 그 시선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건, 책, 피규어 등등 사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나는 방에서 여러 시선들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피규어, 장난감, 수백 권의 책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고 영화 포스터에 배치돼있는 배우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특히 이상하리만치 나를 많이 쳐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는 건 지금은 폐간된 잡지 'LIFE'에서 나온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잡지의 주인공, 로렌 바콜이다. 내가 로렌 바콜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게 된 후에 한 행동은 그녀가 데뷔 직전에 ‘하퍼스 바자’의 모델로 표지에 실렸을 때의 사진을 핸드폰 메인 배경화면에 등록해놓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타임라인 속에서 서로 쳐다보고 있던 셈.  




    

이 잡지를 구매한 건 비단 로렌 바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범죄 영화 역사에 대한 이야기, 카사블랑카 기념 잡지 등 여러 잡지들을 한꺼번에 구매했었다. 해외 잡지들을 한 번씩 살 때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사는 편인데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정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글보다 사진이 많은 걸 찾아내는 것. LIFE 잡지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사진이 유명했기에 타이틀만 보고 내 입맛에 골라서 사면 되는 항목이었다. 지금도 가끔가다 한 번씩 그들이 지냈던 과거에 찾아가고 싶어 훑어볼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여러 권의 책들을 책장에 다 꽂아 넣고도 로렌 바콜의 잡지만 정면으로 세워둔 이유는 그녀의 프로필이 굉장히 뇌쇄적이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눈에 들어오는 배우는 쫓아다니는 편이지만 로렌 바콜은 특이한 케이스 중에 하나다. 다른 배우를 쫓아다니다가 서서히 젖어든 배우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누군가를 힐끗힐끗 보게 되는 그런 느낌의 배우. 그리고 내가 쫓아다녔던 배우는 그녀의 남편이 되는 ‘험프리 보가트’다. 첫 번째 만남이었던 영화 <소유와 무소유>를 찍은 후 25살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가지고도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연애전선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든 건 그녀였고 그 후로도 약 3편 정도의 영화를 함께 찍었다. 심지어 그녀는 험프리 보가트만큼 담배를 많이 폈다. 둘 다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연기를 했던 걸까.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며 두 사람의 사인은 모두 담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 환상의 짝꿍. 그런 그녀의 초기작은 대부분 하드보일드 영화였고 당연하게도 팜므파탈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섹슈얼하거나 관능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다.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섹스 심벌의 대표적인 배우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을 정도다. 오히려 그 이미지를 가지고도 연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와 눈빛은 날렵하고 날카로우며 한편으로는 야릇한 시선들을 지니고 있는데도 왜 좋아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유혹한다’라는 정의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그녀의 조건은 거의 완벽하다. 훤칠한 키에 마른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눈빛. 그중에서도 눈빛만큼은 헨젤과 그레텔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여러 빵조각을 흘리는 것처럼 흘리고 남자 주인공과 우리는 영화 상영 내내 그 빵조각을 줍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만 끝낸다면 그냥 전형적인 여느 팜므파탈 역할과는 다를 게 없을 거다. 그녀는 분명 여러 방식의 유혹을 하고 있고 그것들을 흘리는데 흘리는 게 아닌 것 같이 행동한다. 밀고 당기기의 고수라고 해야 할까. 그 방식이 유려하지는 않아 보여도 맺고 끊는 방식이 확실하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상당수 나오는데 그 결단의 매력이 있다. 이미지를 넘어선 태도의 변화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아마 그런 밀고 당기기의 매력을 험프리 보가트도 분명 느꼈기에 결혼을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남자를 다루는 선을 아는 매력적인 여성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노래 실력도 꽤나 출중해서 인생의 후반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활동을 하기도 했다. 높은 곡들을 소화할 정도의 실력으로 들리진 않지만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감미롭게 부르는데 영화 <소유와 무소유>에서 부른 ‘How Little We Know’라는 곡이 나오는 장면은 그녀의 목소리에 빠지는 것과 더불어 내가 지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그녀의 시선처리로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는 게 가히 장관이다. 한 명만 유혹하면 되는 그 장면 속에서 굳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왜 모두를 쳐다봐야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스크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 매력적인 면모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는 썩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잘 갖춰진 그녀의 시선이 연기에 한계를 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가만히 들춰보면 그녀의 배우 커리어를 거론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대부분 남편과 공연했던 영화들이 거론되는 편이다. 그리고 어떤 영화에 나왔었다고 생각을 해도 크게 인상적인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예 없다는 건 아니다) 나조차도 그녀가 험프리 보가트와 연기하지 않은 다른 영화들을 보게 되면 어색함을 느껴서 그녀의 다른 연기를 살펴보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하물며 다른 영화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메인 캐릭터보다 서브 캐릭터로 나왔던 영화들을 더 이야기하게 되니 알 수 없는 미안함이 가중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죽기 직전까지도 꾸준히 작업을 해 나아갔다. 한편으로는 항간의 시선이 질리기도 했을 것이고 한계를 느끼기도 했을 텐데, 모르고 포기하거나 알고 노력하는 건 정말 천지차이인 것 같다. 그런 공로를 알았는지 감사하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그녀에게 공로상까지 줬다.     



이런 꾸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과의 일상을 굉장히 잘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스타들은 일상보다 스타 생활에 더 집착을 한 나머지 여러 사건과 루머가 따르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사건들은 없었다. 다시 잡지로 돌아가 보면 그녀의 프로필 사진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렇게 강렬하고 매력적인 면모를 갖춘 그녀와, 거친 언행이나 불같은 성격을 가진 할리우드의 대배우의 가족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신기할 정도로 생각보다 다정다감해 보인다. 약간은 무서운 엄마 같을 수도 있는 이미지인데 가족들과 있을 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눈빛이 아닌 그윽한 눈빛을 품고 있다. 그녀가 말한 이야기 중에 결혼 생활이 5년이 넘어가면 그 결혼 생활은 영원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일상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무언가 통달한 사람의 이야기 같은 말이 그녀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습게도 험프리 보가트는 그녀의 이성관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분명 본인도 그러했으면서. 또 한 번 말하지만 정말 환상의 짝꿍. 




     

이런 로렌 바콜을 내가 찾아낸 게 아니라 그녀가 서서히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내가 참으로 열심히 다가가고 있었다. 과연 내가 영어를 잘하게 돼서 그녀가 집필한 자서전을 보는 날이 오게 될까? 그렇다면 다가가고 있던 내가 그녀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야릇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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