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ceed with Caution
미리 고백한다. 나도 미국 로스쿨에 진학하기 전, 혹은 진학한 뒤에도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기회가 맞지 않아서 (라고 쓰고 능력 부족이라고 읽는다) 대형 로펌 변호사로서 근무해 보진 못했지만, 방학 동안에 꽤 규모 있는 로펌에서 인턴을 해본 적도 있고, 현재 알고 지내는 동료 변호사들이나 선후배들 중에 대형 로펌 변호사가 많아서 이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대형 로펌"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누군가에겐 "투자은행" 혹은 "전략 컨설팅") 미국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 치고(특히 유학생들) 대형 로펌에 가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드 수츠나 굿 와이프에서 나오는 것처럼 멋진 대리석 바닥과 고급진 마호가니 가구로 장식된 사무실, 빌딩 숲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문과 억대 연봉, 누구나 한 번쯤을 동경해 봤을 법한 인생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미국 로스쿨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대형 로펌에 가지 못하면 "루저"라고 하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대형 로펌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폐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다. 잠깐, "능력주의"는 무조건 좋은 거 아닌가? 능력주의라는 것은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보상과 높은 사회적 지위를 주는 건데, 여기에 무슨 "폐해"가 있다는 것인가? 오히려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이 아닌가?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대니얼 말코비츠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의 저서 "능력주의의 함정" (Meritocracy Trap)에 따르면, 기존에 제조업과 중산층 위주의 사회가 고도의 지식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 사회로 이전하면서, 엘리트 상류층의 주된 자산은 더 이상 토지나 공장 등의 형태가 아닌, 무형의 지적 자산(지적 능력+근면성)의 형태를 띠게 되고, 이는 현대 사회의 엘리트 상류층이 훨씬 더 고강도의 업무를 장시간 견뎌내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한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뛰어난 지적 노동자 1명이 수십 명의 비숙련 노동자를 대체하며, 업무가 고도로 숙련화 될수록 대체할 자원이 희귀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대형 로펌 변호사에 대입해 보자. 일단 대형 로펌에 입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여러 번 체에 걸러져서 고르고 골라진 인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명문대 학부, 명문 로스쿨, 뛰어난 로스쿨 성적 등을 통해 지능과 근면성이 검증된 사람들인 것이다. 이 사람들은 엄청난 근면함을 가진 일 중독자들이라 산속에 데려다가 도끼 한 자루만 쥐어주면 거기 있는 모든 나무를 찍어 넘어뜨릴 기세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대형 로펌들은 이런 사람들을 연봉 19만 불을 줘가면 어쏘 변호사로 채용한다.
그러나 세상엔 공짜가 없고,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로펌에서 19만 불을 연봉으로 주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로펌은 의뢰인으로부터 그 배를 받아내기 때문이며, 그만큼 어쏘를 갈아 넣어(!) 업무에 투입하기 때문이다. 변호사 업무를 실제로 해보지 않은 로스쿨생이나 일반인들은 빌러블아워(billable hour)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아서 로펌의 정확한 업무량과 강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빌러블아워라는 것은 의뢰인에게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변호사가 로펌에 오전 9시에 출근했는데, 커피 한 잔 먹고 화장실 갔다 와서 컴퓨터를 켜고 동료와 잡담을 나누다가 10시에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고 하자. 일반 직장인의 기준으로는 어쨌든 9시에 출근을 했기 때문에 일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변호사의 기준으로 9~10시의 1시간은 빌러블아워가 아니다. 엄연하게 말하면 출근했지만 일은 안 한 셈이다.
빌러블아워는 6분 단위(즉 0.1시간)로 측정되는데, 예를 들어 A라는 의뢰인에게 이메일이 왔으면 이를 열어서 읽고 답변을 작성하는데 총 18분이 걸렸다면 0.3시간을 청구 가능한 것이다. 그 뒤에 갑자기 B의뢰인한테 전화가 와서 30분 전화 상담을 했다면 0.5시간을 청구할 수 있다. 비유를 하자면, 학창 시절에 초시계를 놓고 책상에 앉아서 딴짓하는 시간 빼고 실제로 공부하는 "순 공부시간"을 재면서 공부하는 생활이 매일매일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로펌에는 공식적/비 공식적으로 빌러블아워 최소 요구조건이 있다. 보통 1년에 2000시간 내외이며, 많이 일하는 곳은 2400인 경우도 있다. 단순하게 2000시간으로 보면, 일주일에 40시간 곱하기 50주 하면 된다. 일 년이 52주이니까 2주는 휴가 간다고 치면, 일 년 내내 매주 40시간의 빌러블아워를 찍어야 한다. 일주일은 5일이므로 단순 계산으로 하루에 8시간 빌러블아워만(?) 찍으면 된다.
과연 쉬울까? 공부를 제대로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에 "순 공부시간" 8시간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필자도 변호사 시험 준비할 때 약 두 달간 초시계로 재가며 매일 순 공부시간 8시간 내외로 공부한 적이 있는데, 다시는 못할 짓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로펌에서 일하는 게 "공부"라는 다른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시험"에 가깝다. 쉽게 비유하자면 "수능시험"의 강도와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마 수능도 "순 시험시간"은 8시간 안될 것 같지만 가장 유사한 비유가 아닐까.
로스쿨 생이라면 로스쿨 기말고사 시험의 강도로 빌러블아워처럼 일한다고 보면 된다. 미국 로스쿨에서는 일반적으로 짧은 건 3시간, 길게는 8시간 혹은 24시간짜리 시험도 있는데, 시험을 한 번 보고 나면 기력이 탈진할 정도로 모든 정신력을 쏟아붓는 일이다. 대형 로펌 변호사는 이를 거의 매일 겪는다고 보면 된다. 왜냐면 그만큼 의뢰인은 로펌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 붓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어쏘가 실수로 마침표를 문장 끝에 두 개 찍었다가 파트너가 복도 반대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쫓아왔다는 얘기가 절대 과장이 아닐 수 있다.
"대형 로펌에 취업 못하면 루저"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이러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미국 로스쿨 준비 중 혹은 재학 중이라면 과연 다음 직장에 취업하여 견딜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취업 시 연봉 19만 불, 다만 조건은 매일 풀세트 LSAT실전 시험을 응시해야 하며, 하루라도 170점(LEET로 치면 대략 130점) 이하로 떨어지면 즉시 해고" (이는 그나마 괜찮은 조건인 것이 매일 업무 강도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업무량이 매우 불규칙한 대형 로펌에 더 근접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단, 사전 고지 없이 하루에 LSAT 풀세트를 두 번이나 세 번 응시해야 하는 날이 몇 주 혹은 몇 달 이상 계속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