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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Jun 21. 2022

일기 쓰는 법을 까먹다

업무상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어느덧 블로그에 소홀하게 됐다. 예전에 개업 변으로 활동했을 때는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블로그를 자주 썼는데, 정부에서 일을 시작한 뒤로는 블로그에 왠지 잘 손이 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신변잡기적인 내용을 써보려고 블로그를 열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는 내용의 포스팅이 되어서 한 페이지 정도 쓰고선 그냥 지워버렸다.


변호사의 글쓰기는 매우 정형화되어있다. 그것이 영어든 한글이든 일단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최대한 정확하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위해서 정제된 표현과 구성을 사용하게 된다. 당연히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과 논리가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자유롭게 글을 써본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글의 구성이나 논지, 흐름이나 정확한 의사전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손 가는 대로 쓰는 글 말이다.


사실 관계가 아닌 감정과 추상이 주된 글을 다시 쓰고 싶다. 매일 트랙 위의 정해진 길만 달리다가 막상 탁 트인 초원에 방목되자 무엇을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하는 경주마가 된 심정이다. 심지어 한글로 글을 쓰는 것도 예전에 비해서 어려워지고 있다. 영어만큼 직관적이고 단순한 언어가 없으며, 한글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표현이 가능한 언어가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어쨌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회사에 출근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매일 오전 6시 기상, 6시 30분 업무 시작(로그인), 저녁 3시 퇴근(로그아웃)을 반복하고 있다. 아침형 인간인 나에게는 이것이 최적의 업무 효율을 낼 수 있는 일정이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공무원의 최대 장점은 일단 정해진 시간만 채우면 필요한 업무를 제때 마무리한다는 전제하게 칼퇴근을 할 수 있고, 일단 퇴근을 하고 나면 머릿속에서 일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인데, 정신 건강에는 최고인 것 같다. 예전에는 저녁이나 주말에도 쉴 새 없이 사건의 해결 방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의뢰인의 이메일이나 전화 연락에 대응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업무상의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 개업 변 시절의 인간관계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슨 생각으로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개업 변호사로 활동할 생각을 했는지 참 무모했던 시절이다. 물론 그만큼 맨땅에서 헤딩하면서 남들을 경험해보지 못한(물론 좋은 쪽 나쁜 쪽 모두) 별의별 일들을 접해보긴 했고, 이것이 분명 변호사로서 성장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긴 했다. 비유를 하자면 거친 서부의 황야에서 카우보이처럼 권총 한자리 들고 말 타고 다니면서 용병으로 일하다가, 정부군에 입대한 뒤 조용한 사격장에서 최신 첨단장비로 무장된 소총을 들고 사격 훈련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태생이 성장과 경쟁을 즐기는 성격이다 보니 소송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없어서 최근에 보스에게 자문 업무뿐만 아니라 소송도 맡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보스는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식이었는지, 엄청난 대형 소송을 맡게 해 줘서 갑자기 업무량이 급 늘어났다. 아마 당분간은 소송의 '소'자도 꺼내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아무리 수가가 큰 소송이라고 하더라도 예전에 형사 사건을 변호하던 것만큼의 심적 부담은 없다는 것이다. 피고인을 대리하면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맥박이 뛰고 살아 숨 쉬는-의뢰인의 자유가 달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음주운전, 절도 사건이라고 해도 그 엄청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곤 했었다. 그런데 정부 변호사로서의 소송을 맡는 경우, 의뢰인은 실체가 없는 "정부(government)"라는 추상적인 존재이며, 소송의 수가는 아무리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냥 숫자에게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변호인의 의무 중에 하나인 zealous representation(해석하자면 "열정적인 변호"라고 할 수 있지만, 열정적이라는 말로는 조금 부족하고, 조금 과하게 "광신도적인" zealot (그 "질럿" 맞다)의 어감이 더 강하다)을 따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자칫 실수하면 눈앞의 의뢰인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라는 부담감보단 훨씬 덜하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성공한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어쩌다가 일기 비슷하고 정확한 기승전결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부담감 없는 일기 형식의 글을 더 자주 쓰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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