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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Nov 25. 2022

공무원에게 일 시키는 방법

귀차니즘, 평판, 관계


공공기관 소속 변호사로 일을 하면서 최근에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공무원을 일하게 하는 동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일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사기업이라면 승진, 보너스, 해고의 위협 등이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못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되겠지만, 공무원에게는 위와 같은 요소가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공무원의 최대 장점인 안정성 때문이다.


공무원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인 이 안정성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자신이 하는 업무를 특별히 잘하거나 신속하게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어떤 일을 잘 처리하더라도 돈을 더 주는 게 아니고, 특별히 못한다고 해서 해고의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일주일에 40시간을 채우면 통장에 2주마다 돈이 따박따박 찍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선배 동료 변호사가 했던 얘기가 있었다, "의뢰인(물론 우리의 의뢰인은 전부 공무원이다)이 어떤 법률 검토를 요청했는데 그 검토를 요청한 동기가 명확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그 공무원은 최대한 일을 적게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자문 받기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면 된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가끔은 의뢰인이 어떤 법적 쟁점에 대한 자문을 요청할 때, 대부분 "이러이러한 업무를 추진하려고 하는데, 혹시 여기에 대한 어떤 법적 리스크가 있나요?"라고 물어보기보단,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법적 리스크는 없겠죠?"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더 흔하다. 후자의 경우 이미 의뢰인의 마음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답정너")


예전에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그냥 정직하게 "아 그렇게 하면 이러이러한 법 규정이 위반될 수 있고, 더불어 이러이러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모범 답안을 주곤 했었다. 그러면 의뢰인은 자신이 원한 답이 아니라 실망하는 듯한 눈치이거나, 심지어 어설픈 법률 지식으로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종류의 의뢰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생겼다. 바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려면 이러이러한 법적 리스크가 있고, 그렇게 되면 당신이 추가로 이러이러한 서류를 우리에게 보내서 검토 받아야 하고, 당신 상사가 이것저것 승인을 해야 되고, 다른 부서와 이런저런 협업을 해야 합니다." 즉, "법적 리스크"보다는 "귀차니즘 리스크"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매품으로 "서면/공문으로 (혹은 이메일로) 써서 저희한테 보내시면, 검토해 드릴게요"라는 것도 있다. 보통은 의뢰인이 전화나 구두로 어떠한 업무에 대해 자문을 요청을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업무가 별로 법적 효용성이 없거나 비상식적인 경우 효과적이다. 의뢰인에게 방금 말한 내용을 서면으로 다시 요청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스스로가 글로 쓰려고 하다가 자신의 생각이 별로라는 것을 깨닫고 알아서 접는(?) 경우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가끔 터무니없는 생각을 열심히 이메일로 적은 뒤 자문해 달라고 보내는 의지의 미국인(!)도 있긴 하다)


또 한 가지 효과적인 것이 있다. 의외로 공무원들이 평판(업무 평가가 아니다)과 관계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그렇게 일을 하게 되면 업계에서의 우리 기관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아질 거예요" 혹은 "그러면 다른 부서에서 당신네들을 싫어할 거예요"라는 방법도 꽤나 효과적이다. 아무래도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공무원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공무원 사회가 워낙 좁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물론 나도 공무원이다 보니 귀차니즘, 평판, 혹은 관계로부터 100%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로부터 '어휴, 어쩜 저렇게 공무원스럽게 답답할까'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외에 다른 동기 요인(자기 발전, 사명감, 책임감 등)을 꾸준히 되새기고 잊지 않을 것이다. 언젠간 '와, 저 사람은 공무원 답지 않게 열심이네'라는 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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