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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Jan 14. 2023

변호사의 역할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법정 변호사(trial attorney)로 활동하던 시절, 변호사의 역할은 이미 일어난 사실 관계를 법이라는 해석의 틀로 분석하고 의뢰인에게 유리한 법리 혹은 사법적 사실(혹은 형식적 진실)을 만들어 내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의뢰인이 운전 당시 교통 신호가 파란불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상대방 당사자도 자신의 신호가 파란불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진실(실체적 진실)은 당사자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의뢰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판사나 배심원이 의뢰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줘야 한다. 만약 판사가 우리 의뢰인의 손을 들어준다면, 사법적 사실(즉, 법적으로 인정된 사실)로는 우리 의뢰인의 신호가 파란불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 사실이 실제 진실의 여부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법의 테두리 내에서는 분쟁 해결의 형식적 절차 내에서 이루어진 법적 사실에 대한 판단은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하면, '정확히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를 통해서 누군가가 승리를 한다면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한 것으로 간주하자'라고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경우 변호사의 역할은 주어진 절차를 최대한 활용하여 의뢰인에게 유리한 법적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자문(advisory) 및 송무(litigation)을 하면서, 변호사로서의 내 역할이 크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특히 자문의 경우에는 위에서 언급한 법적 사실을 만들어내는 역할보다는, 오히려 법적 사실을 만들어낼 필요 자체를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법원을 통한 분쟁 해결 방식 자체가 언제나 실체적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분쟁이 생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리스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자문 변호사의 역할은 미래를 예측하여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분쟁 가능성을 예상하여 이를 계약서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분쟁 발생 시나리오를 전부 커버하려고 하니 계약서가 복잡해지고,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계약서는 그 분량이 많고, 내용이 어렵기로 악명 높다. 예를 들어, 그나마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단순한 주택 임대차 계약(영어로는 lease agreement)도 웬만한 경우 수십 장이 넘는다. 그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세입자가 매달 며칠마다 월세를 얼마씩 내야 한다는 기본적인 내용부터, 세입자가 지켜야 하는 조건(애완동물의 종류나 크기, 마리 수 제한 등을 명시하거나, 게스트 방문이 최대 몇 명까지 며칠간 어떤 사유로 방문 가능한지 등등)을 세세하게 명시한다. 아마 계약서 조항의 95%는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을 시나리오를 다루고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넣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미국의 다양성에서 오는 불확실성의 리스크 때문인 것 같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인종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법과 사고방식, 행동 방식이 다 다르다. 내가 집 주인일 경우, 이번에 새로 들이는 세입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실제로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계약서에 자신이 우려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예상해서 이를 계약서에 반영하면 불확실성에서 오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주인이 수도세를 내는 경우 예전 세입자가 물을 너무 많이 쓰고, 밤에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집안에서 쿵쾅거리며 운동하는 사람이어서 집주인이 항의로 곤욕을 치렀다고 치자. 다음 세입자와 계약할 경우, 물 사용량과 야간 소음한도 데시벨 제한 규정 등을 계약서에 넣으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이 조항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이를 어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애초에 계약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행여 이를 간과하고 계약서에 서명했다면 나중에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집주인이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문 변호사의 역할은 이러한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고 집 주인에게 어떤 조항을 넣을 것인지, 그리고 그 조항을 어떤 식으로 써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지 조언하는 것이다. 집 주인이 가능한 모든 리스크를 알기 위해 진상 세입자를 일일이 다 겪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임대 관련 분쟁 전문 변호사는 업무 특성상 이러한 분쟁을 매일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분쟁 유형을 일일이 다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대처할지 알게 된다. 결국 어디까지가 현실적인 리스크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적인 리스크인지를 나름대로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주택 임대차 계약도 분쟁의 소지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하물며 기업과 기업을 사고파는 M&A나, 수백수천억의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전투기 구매 사업 같은 경우 그 분쟁의 소지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계약서는 수백 혹은 수 천장이 넘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서가 가능한 모든 분쟁의 리스크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미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상장 기업이 내부 비리나 회계 조작으로 하루아침에 상장 폐지되거나, 석유로 무한한 부를 누릴 것 같은 산유국이 불과 몇 년 사이에 파산해 버리는 일이 생기는데 이를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자문 변호사의 숙명이고, 이는 자연적으로 편집증적 사고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론상) 완벽한 계약서를 만들어 놓고 서명만 남은 시점에서도 퇴근하는 길에 '만약 내일 계약서에 서명할 상대방 당사자가 비행기 타고 오는 길에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지? 계약서에 대리인 서명 조항을 넣었어야 하나? 그럼 그 범위는 누구로 한정하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변호사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 이 계약이 미뤄져 의뢰인이 손해를 입게 되면, 이를 비난받는 것도 변호사이다. ("왜 그런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지 않았습니까!" - 왜냐면 아무리 발생 확률이 낮은 사건이라도, 일단 일어난 뒤에 이를 왜 예방하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이렇듯 태생적으로 변호사라는 직업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여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변호사들 중에서는 리스크에 극도로 민감한(risk averse)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 가장 큰 리스크는 사람 리스크이다. 변호사들이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선 A라고 해놓고, 뒤에는 B를 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리스크에 민감한 사람들이 (이를 최소화하는 역할의) 변호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서 선택하는 것도 있다.


이제 8년 차가 변호사가 되어가면서 느낀 점은 결국 사람마다 리스크 허용성(risk tolerance)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이 일하는 동료 변호사든, 자문을 의뢰하는 의뢰인든 각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리스크에 대한 허용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문을 할 때는 항상 이를 명심하여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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