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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Feb 20. 2023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좋은 점


한때는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란 점이 인생 최대의 아쉬움이었다. 특히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 남들은 30분이면 읽는 판례를 몇 시간에 걸쳐서 읽어야 했고, 그만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도는 원어민들에 비해서 떨어졌다. 리걸 라이팅 수업에서도 나는 브리프 하나 제출할 때도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쳐서 고르고 골라야 비로소 남들이 대충 몇 번 고친 수준의 브리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로스쿨 졸업 후, 해가 지나서 어느새 8년 차 변호사가 되고 나니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단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관점에 따라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 말/글 실수가 적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원어민과는 근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생성 원리가 다르다. 좀 조악한 비유를 하자면, 원어민의 언어적 뇌는 마치 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대로 (복잡한 사고를 거치지 않고) 바로 얘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일단 사고를 뇌에서 떠올린 뒤 그것을 영어로 출력하는 추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한 번 자체적으로 걸러진 말과 글을 쓰다 보니 실제로로 실수가 적어진다.


그리고 정해진 스크립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모르는 표현이나 애매한 표현을 어설프게 쓰지 않고, 확실하게 아는 표현이나 문장을 쓰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필요 없는 말을 한다든지 기분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일이 매우 적어진다. 어떻게 보면 표현의 창의력이 없어서 지루하고 로봇 같은 사람으로 비칠 순 있겠지만, 변호사 업무에서는 지루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창의적으로 사고 치는(!) 사람보다 훨씬 좋다.


마지막으로 문법적 실수가 원어민보다 적다. 원어민이 영어를 습득(acquire) 한다면, 외국어 학습자는 영어를 공부(study) 해서 배운다. 전자는 문법이나 어휘를 따로 배우지 않는 대신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언어의 데이터를 받아들여 나름대로의 문법과 표현의 규칙을 스스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영어의 문법과 규칙을 먼저 배운 뒤에 거기에 맞는 예시를 끝없이 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는 학창 시절부터 학부시절(영어교육 전공)까지 공부한 영어 문법이나 어휘, 용법 등이 정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원어민들이 정말로 흔히 틀리는 표현이나 문법을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건, 미국 생활이 10년을 넘어가다 보니 원어민이 하는 실수를 나도 가끔 하게 된다는 것이다)


2. 끊임없는 배움(지적 즐거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장점이다. 영어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 정말로 기발하고 신기한 표현 같은 것을 배우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똑같은 도구만을 사용하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 편한, 새로운 도구 사용법을 배우는 것 같다. 그러면 나도 그 도구를 쓰는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최근에 배운 몇 가지 재미난 표현을 나열하자면,


Drinking from a firehose (말 그대로 소방용 호스로 물을 마시는 만큼 일이나 업무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

Let's park the idea. (어떤 아이디어를 주차장에 주차하듯이 ㅋㅋ 세워놓고 더 고민해 보자는 뜻. 자매품으로 Let's put a hold on that idea)

He's punching above his weight. (그는 기대한 것보다 그 이상의 일을 해오고 있다. 뭔가 만화 캐릭터처럼 큰 주먹으로 무언가를 때리는 상상을 한다 ㅋㅋ)


등등이 있다. 이러한 기발한 표현을 듣고 난 뒤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언젠가 이를 적절하게 써먹게 되면 뭔가 묘한 쾌감이 있다. 아마 원어민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를 것이다.


3. 일과 생활 분리(워라밸)

이건 최근에 느끼는 것인데, 업무 시간 내내 하루 종일 영어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다가 퇴근을 하면 거의 영어를 쓰지 않는다. (와이프하고 종종 영어를 쓰긴 하지만, 이는 일이나 업무 관련, 혹은 심각한 사회 현상 등 와이프가 한국어로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인 경우에만 한정된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일과 생활의 완벽한 분리(?)가 가능해진다.


이중언어 사용자들은 대부분 느끼는 일이겠지만, 영어를 사용할 때의 내 성격이나 말투가 다르고 한국어를 사용할 때의 내 성격이 말투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업무가 끝나면 한국어 모드로 전환해서 더 이상 업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일상생활과 일을 철저하게 분리 가능하다.


그리고 추가로 영어로 부정적, 감정적인 텍스트나 표현을 듣더라도 원어민 같은 즉각적인 감정 반응이 없어서 이에 대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적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영어로 f**k 이나 h*ll, sh*t 같은 표현을 들어도, 이들이 비속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와서 박히거나 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외국어다보니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그러한 표현이 가진 무게와 감정 반응을 희석시키는 것 같다.


4. 나만의 고유성/정체성 형성

이것도 비교적 최근에 느낀 점인데, 내가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내 스스로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때는 내 영어에서 한국식 악센트를 없애려고 노력했고, 나름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생각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살아가는 방식, 말투, 행동에 녹아있는 한국스러움이 결국 "나"라는 인격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라는 점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식 및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든 싫든) 필요한 하나의 개성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최근에 깨달은 "미국스러움"이라는 것은 백인이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며 미식축구를 보는 것 같은 우리가 생각하는 틀에 박힌 극히 피상적인 미국의 모습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 혹은 그 후손들이 자신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한 채, 이를 융화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는 내가 오히려 한국인 이민자 출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미국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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