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생활을 통해 영어를 업그레이드하다
엄연히 말하면 대학 생활은 아니지만,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카투사에 지원해서 군복무를 시작했기 때문에, 편의상 대학시절로 분류를 했다.
1. 카투사 지원
막 성인이 된 대한민국 남성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도 당시에는 군복무가 인생최대의 걱정거리였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 영어를 공부하는 전공을 택하게 됐고, 군 복무를 하면서도 영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투사라는 복무제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저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1년 뒤처진다는 생각에 남들 노는 신입생 때도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해서 잃어버린 1년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텝스(TEPS) 공부를 꾸준히 했고, 다행히 1학년 때 800점을 (2000년대 초반이던 당시에는 990점이 만점이었을 것이다) 넘겨서 카투사에 지원할 수 있었고, 운 좋게 합격했다.
2. 카투사 생활
지금은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때는 논산의 육군훈련소에서 5주간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의정부에 있는 카투사 훈련소(캠프 잭슨)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뒤, 대구에 있는 캠프 헨리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당시에 나는 운전면허증이 있었고, 영어 점수가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그런지 헌병이 아닌 운전병 보직을 받게 됐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군 운전병이 아닌, 카투사 인사과에 있는 한국군 지원대장의 운전병으로 배치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대와는 달리 근무시간 내내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3. 영어 공부
그렇게 미군들과 부대끼며(?)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따로 시간을 들여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카투사의 최대 장점 중에 하나인, 일과가 끝난 뒤 취침 점호 전까지는 각자 방에서 자유롭게 개인 정비 및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살려서 매일 저녁에는 영어 공부를 했다. 유학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카투사가 그러하듯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영어 회화였기 때문에, 주로 회화 위주로 공부를 했다.
일단은 우선적으로 다양한 회화 표현을 머릿속에 넣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다양한 영어 표현을 단순 무식하게 외웠다. 그때 썼던 교재가 아직도 기었나는 데, 책 제목이 "이런 동작 저런 행동 영어론 어떻게 말하지?" 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왜 기억하느냐면, 영어교육과 1학년 때 전공 교수님이 진행하는 회화 수업을 들었는데, 이 책을 추천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군대에서는 딱히 일과 끝나고 할 일이 없어서, 이 책을 무작정 달달 외우는데 시간을 보냈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 상황별 영어 표현을 그대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통째로 외웠는데, 돌아보면 이때야 말로 내가 회화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기초를 다질 수 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거짓말 살짝 보태서 책을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약 450 페이지를 머릿속에 그대로 복사해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아마 20대 초반의 싱싱한 뇌 +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 + 적절한 운동의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뒤로는 영어 발음과 듣기에 집중을 했다. 그 무엇보다 아침에 발음 연습할 기회가 많았는데, 바로 아침 PT(Physical Training) 시간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매일 아침 5시 30분쯤에 포메이션을 하고, 6시쯤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동안 매일 부대 PT를 했는데, PT는 대개 제자리에서 하는 체조와 구보로 나눠졌다. 체조의 경우 그날의 리드가 구령을 하면 나머지 부대원이 따라 했는데, 이때가 나에게는 영어를 큰소리로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구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군가처럼 미군에도 구보할 때 부르는 cadence가 있는데, 이 노래 가사들을 숙지해서 크게 따라 부르면서 발음 공부를 했다. 그때 당시의 cadence들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Up in the morning before day~" 혹은 "C-130 rolling down the street ~")
듣기 공부로는 당시에 유행하던 프렌즈(Friends)라는 미드를 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실력으로는 약간 무모하게도 자막 없이 열심히 프렌즈를 봤는데, 말이 너무 빠르고 cultural reference가 잔뜩 들어간 유머가 많아서 그런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매일 최소 에피소드 하나는 여러 번 돌려보면서, 안 들리는 부분은 뭘까 고민을 하면 새로 배운 표현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이야 프렌즈를 재밌게 볼 수 있지만, 사실 그때는 솔직히 재미보다는 교보재로 접근을 해서 그런지, 드라마 자체가 재밌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프렌즈 외에도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도 봤는데, 프렌즈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웅얼거리고 빨라서 더더욱 고전했던 기억이 있다.
4. 텝스 공부
위와 같이 회화 공부를 하면서도 기본적인 영어 실력의 밑바탕이 되는 독해와 어휘 실력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텝스 공부를 꾸준히 하며, 거의 매달 텝스 시험을 응시했다. 업무적으로 영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PT를 하면서 혹은 미군들과 훈련을 받으면서(Sgt.'s time training) 영어에 노출이 되고, 일과 종료 후에는 따로 회화 및 텝스 공부를 하다 보니 매달 텝스 점수가 조금씩 올라갔고, 공부한 결과가 수치로 확인되니 동기부여가 됐다.
이렇듯 내가 카투사로 생활하면서 보낸 약 2년(훈련소 시절을 제외하면 1년 9개월 정도)의 시간은 영어 실력을 크게 향상하는데 도움이 됐고, 제대한 뒤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알바를 구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이후 “미국 변호사의 영어 고군분투기 (6)-대학 생활(하)”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