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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Mar 04. 2024

미국 변호사의 영어 고군분투기(6)-대학 생활(하)

영어로 돈 버는 재미를 깨닫다

이전 글에서는 카투사 생활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 영어 실력을 늘렸는지 썼다. 이번에는 전역한 뒤 어떤 식으로 영어 실력을 활용했고, 동시에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는지 적을 예정이다.


1. 각종 통번역 알바

나는 4월 군번이라 전역도 4월에 했다. (당시는 24개월 복무) 그래서 차라리 약 11개월을 더 쉬고, 이듬해 3월에 복학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 11개월 동안 나는 휴학생 신분으로 여러 가지 영어와 관련된 알바를 할 수 있었다. 남는 게 시간인 휴학생이라 과외는 물론, 학과 사무실로 오는 각종 통번역 의뢰와,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행사 진행요원 등 영어 능력을 활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덕분에 전역 후 남은 대학 3년 동안은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혼자 충당할 수 있었고, (물론 학교가 본가와 가까워서 부모님 집에서 숙식이 해결된 점도 있다) 더불어 실전을 통해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내가 당시 지방대 생이라 다행이었던 점은, 영어 알바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즘은 다르겠지만 2007년~11년 당시만 해도, 청주에서 영어로 프리토킹이 가능한 대학생이 많지 않았고 있더라도 충북대에서는 우리 과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다 보니 충북 권역에 위치한 사기업들은 우리 학과로 통번역 의뢰를 많이 했고, 나는 덕분에 여기저기 통번역 알바를 참 많이 할 수 있었다. (마침 전역 후 아버지께서 쓰시던 차를 물려받아서 이동에 제약이 없었던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 알바 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대표 심사관 및 출전 선수 전담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기능올림픽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기능올림픽이란 말 그대로 기술로 치르는 올림픽이다. 2년마다 미용, 전자제어, 웹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용접 등 당시 약 40개가 넘는 종목에서 세계 각국의 어린 선수들이 출전하여 실력을 겨루는 행사였다. 내가 맡은 종목은 웹디자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웹디자인 대표 선수가 충북전산기계공고에 재학 중이었으며, 우리 학과사무실을 통해서 통역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국제 기능올림픽은 11월에 개최되었는데, 몇 개월 전부터 참가국 심사관들이 온라인 포럼을 통해 대회에 사용될 시합 과제의 70%는 사전 논의하여 결정하고, 나머지 30% 정도는 시합 당일에 공개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럼에서 진행되는 논의 자체에 대해서 숙지를 하고, 더 나아가 과제가 우리 선수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가는 설득 작업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정말 엄청난 양의 온라인 포럼 텍스트를 번역했고, 웹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실제 대회가 진행되기 2주 전에 현지에 도착해서는 직접 회의를 통해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나라 심사관의 그림자가 되어 밤낮없이 통역을 진행했다. 막상 대회가 시작되면, 시합을 치르는 선수 옆에 24시간 대기하면서, 대회 측에 궁금한 점이나 불편사항 등을 통역하게 됐다. 결과는 웹디자인 종목 금메달! 엄밀히 말하자면 그 친구는 이미 금메달 실력을 갖추었고, 나는 언어의 장벽을 해소해 준 것뿐이지만 내가 금메달을 딴 것만큼이나 기뻤다. 이후 그 친구는 네이버에 입사했고, 최근에는 카카오에서 근무하고 있다.


2. 캠프 카운슬러

두 번째는 미국에서 캠프 카운슬러(camp counselor)로 일하게 된 것이다. 카운슬러라는 말이 들어가서 무슨 상담사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상담과는 별 연관성이 없고, 실제로는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을 지도 관리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한국식으로 치면 수련회 지도사라고 보면 된다. 내가 일했던 위스콘신의 한 여름 캠프는 약 2주 기간 동안 9세~14세의 미국인 남자아이들 100여 명이 가족과 떨어져 산속에서 단체 숙식을 하며, 약 20~30명의 카운슬러로부터 각종 육상·수상 스포츠, 야외 활동 등을 배우는 곳이었다. 이 과정에서 종종 한두 명의 외국인 카운슬러를 고용해서, 미국 아이들이 외국인·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내가 일하게 된 캠프에서는 마침 사격을 가르칠 만한 강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카투사로 전역한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미국 어린아이들에 22 구경 실총 사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자신의 키와 비슷한 장총을 다루기도 버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실총 사격을 가르치는 미국 문화에 충격을 받긴 했다. 게다가 자칫 작은 실수에도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긴장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나는 미군의 사격 안전절차와 통제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애들한테도 군대식(?)으로 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한편, 이 캠프에서는 산속에서 전기도 없이 아이들과 다른 카운슬러(주로 미국 대학생들이다)와 숙식하며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용하는 속어나 은어, 문화 등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전역 후 첫 해 여름 3개월 동안 숙식하며 캠프 카운슬러로 일했는데, 캠프 측에서 비행기값 편도 및 숙식비용을 제공했다. 그 외에 주급도 주는데, 마지막 날 정산해 보니 총급여가 3천 불로, 당시 대학생에게는 꽤 큰돈이었다. 나에겐 어차피 영어 연수나 마찬가지여서 장학금 받고 공부한 셈이라고 생각하며, 그 뒤로 대학생 시절 내내(2~4학년) 여름만 되면 캠프 카운슬러로 일했다. 아무래도 이때 미국 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확실해졌고,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LSAT) 공부를 계획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입국 전에 미국 로스쿨을 실제로 여러 곳 방문해 보기도 했었다.


3. 전공, 텝스, 토익 공부

이렇게 대학 시절 영어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욱더 영어 공부에 매진하게 됐다. 그래서 번 돈의 상당수는 영어 공부로 다시 재투자(?)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생겨났다. 현재 실력과 영어 공부의 진척도를 알아보기 위해 정기적으로 매달 텝스나 토익 시험을 치렀다. 점수가 거의 꾸준히 소폭 상승하곤 했는데, 그 재미가 쏠쏠했다. 학기 중에는 어떤 식으로든 매일 최소 한 시간 이상의 영어회화 수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입학 후 졸업까지 총 7년(대학 4년+군대 2년+휴학 약 1년) 동안 영어회화를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 학원비를 스스로 충당하니 원하는 영어 공부나 강의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나 대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 의지하던 시절에는 어떤 학원이나 강의를 수강하고 싶다고 말하기가 조금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아무튼 당시의 내 생각을 그랬다)


전공이 영어교육이었다는 점도 큰 이득이었다. 일반영어 실력을 증진하는 것과 영어 교육의 방법론을 공부하는 것은 서로 어느 정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특히 전공과목은 전부 원서를 쓰고, 시험 및 발표도 영어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겠지만, 영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나서 그 이론을 나 스스로에게 직접 활용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그래서인지 토익은 대학 3학년 때쯤 만점을 취득했기에 더 이상 따로 공부하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만점이 거의 불가능한 텝스에 계속 매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텝스는 914점을 받았는데, 그 이후로는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느라 더 이상 점수를 올릴 기회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 쌓은 영어 시험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로스쿨 입시에 토대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미국 변호사의 영어 고군분투기 (7)-미국 로스쿨 입시준비”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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