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의 수명도 늘리는 변호사
요즘 참 여러 가지 무료법률봉사를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어느 노부부의 유언장을 작성해주게 되었다. 맨날 형사사건만 하느라 여기저기 법원 가랴, 감옥에 있는 의뢰인 접견 가랴 정신이 없었는데, 이번 유언장 작성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르고,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유언장. 영어로는 Will이다. "Will"은 우리가 아는 미래형 조동사이기도 하지만, 명사로 쓰이면 (보통 앞에 관사 a 혹은 the가 붙어서) 유언장이 된다.
우리가 평소에 유언장을 쓸 일이 있을까? 사실 황혼이 가까워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유언장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주제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유언장에 대해서 생각해봤어?"라고 묻는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금기어를 건드리는만큼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로서의 내 역할은 의뢰인의 의지를 최대한 반영한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언장과 더불어 사전의료지시서(Advanced Medical Directive)와 위임장(Power of Attorney)도 같이 작성한다. 전자는 본인이 위독하거나 심신이 미약할 경우 본인의 의료행위와 관련된 지시사항을 적는 것이고, 후자는 본인을 대신해서 타인에게 재정적 권한을 양도한다는 내용의 법률 문서이다. 예를 들어, 본인이 위독한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 정도와 범위를 규정할 수 있으며, 본인 사망 시 자신의 자산이나 계좌에 대한 접근 권한을 허용할 수도 있다.
사실 유언장의 내용 자체는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다. 어떤 유산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혹은 누가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장례는 화장을 할지 매장을 할지 등등.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 유언장이 실제 법적 효력을 지니도록 제대로 된 절차를 밟는 것이다.
주마다 조금 법이 다르긴 하지만, 버지니아의 경우 최소 2명의 증인(witness)과 공증인(notary)이 필요하다. 증인은 성인이면 아무나 가능하지만 만약 유언장에 상속인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상속인이 아닌 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다. 해당 유언장을 작성한 변호사도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도 실제로 증인으로 서명했다)
어쨌든 이번 유언장 작성 법률봉사를 하면서 유언장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후 본인의 재산에 대한 자유의지를 관철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아이러니하다. 왜냐면 죽으면 더 이상 무언가를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사후에는 만약에 무언가를 소유한다고 쳐도 거기에 대해 즐거워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잃어도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슬퍼할 수도 없다. 모든 감정은 살아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죽고 나면 모아놓은 억만금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일까?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유언장은 결국 삶을 사후에나마 조금이라도 연장하려는 인간의 마지막 유산이 아닐까. 유언장 없이 죽은 자는 생전에 소유했던 재산에 대한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심지어 긴 시간 동안 그 영혼을 담아 봉사했던 육체에 대한 처분조차 말이다. 인간은 의지를 발현할 수 없을 때 죽은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뇌가 기능하지 않으면 뇌사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언장이 있으면 생물학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사자(死者)의 의지는 관철되기 때문에 순수하게 의지의 존재라는 면을 보고 생사여부를 판단하자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지를 가지고 남은 유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유산들이 유언자의 의지대로 처분되는 기간까지 유언자는 살아있는 것이다. 법적 절차에 따라 이 기간이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유산으로 신탁(trust)을 설정한다면 그 기간은 신탁의 유효기간만큼 길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면 변호사는 의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셈이다. 의사는 산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호사는 죽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지 않는가? :)
글: 김정균 미국 변호사(버지니아/DC/뉴욕 주 변호사)
대표 변호사, Ballston Legal PLLC (www.ballstonlegal.com)
대표 코치, Meta Law School Coach LLC (www.metalawcoa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