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체성, 자기표현
내 것이지만 남들이 더 많이 쓰는 게 뭘까요? 바로 이름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평생 들으면서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아내가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래도 이름(first name)이 바뀌는 건 아니죠. 게다가 미국은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을 제외한) 서로의 이름만 부르기 때문에, 종종 같이 근무하던 동료의 성(last name)을 몰라서 "John의 last name이 뭐였지?"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한 이름과 성(gender/sex)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트랜스젠더입니다. 출생 시 주어진 성(sex assigned at birth)과 본인이 지각하는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이 다른 사람들이죠. 이 경우 신분증 상의 이름이나 성별 표시가 실제와 다르다면 살아가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불편함과 편견을 겪게 되겠죠. (여담이지만 제 지인 중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아님에도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진 동성 친구가 있는데 작게는 주변 친구의 장난기 섞인 농담부터 행정상 실수까지 여러 불편을 겪더군요. 물론 트랜스젠더가 겪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죠)
저는 지난 토요일 반나절 동안 이러한 트랜스젠더들이 이름과 성별 표기(gender marker)를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료 법률 자원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중엔 일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자라는 주의라서 토요일 반나절을 통째로 법률봉사에 할애하는 것에 약간 반신반의하면서도, 집 주변 가까이에 있는 로스쿨에서 한다는 점과 미천한 법률 실력이라도 좋은데 쓸 수 있으면 배우는 셈 치고 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게이나 레즈비언은 종종 만난 적이 있는데, 트랜스젠더는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니 제가 그동안 생각하는 트랜스젠더는 아쉽게도 한국 연예인인 "하리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닉이 시작되기 전 약 2시간 정도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 Sex와 Gender의 차이: Sex는 Male, Female, Intersex의 세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 반면 Gender는 M <-> F 사이의 스펙트럼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 (비유를 하자면 Sex는 디지털시계처럼 눈금과 눈금 사이에 중간이 없는 것이지만, Gender는 아날로그시계처럼 중간 단계가 존재하는 것). Sex는 음부를 통한 판별, Gender는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
2. Non-binary (혹은 gender-queer)의 존재: 이 사람들은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성 정체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본인의 대명사를 he/his/him 혹은 she/her/hers 등 특정받길 거부함. (실제로 클리닉에서 만난 한 법대생은 본인을 복수 대명사인 they/them/their로 불러주길 원했습니다)
3. Gender Expression: 위에서 언급한 sex 혹은 gender에 국한되지 않는 본인의 성적 자기표현 방법. Gender와 마찬가지로 M <-> F 사이 스펙트럼의 한 부분에 위치하며 sex/gender와 일치할 수도 일치 안 할 수도 있음.
이번 클리닉에서는 구체적으로,
1. 법원 명령(Court Order)을 통한 이름/성별 표기 바꾸기
2. 사회보장(Social Security) 정보기록
3. DMV에서 운전면허증 기록 바꾸기
4. 출생증명서(Birth Certificate) 기록 바꾸기
5. 여권상 이름/성별표기 수정
6. 이민국 자료, 병무청 기록, 복무 기록 수정 등
을 도와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교육이 마치고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저는 근처 법대의 재학생 두 명과 짝을 지어 저는 의뢰인 접견과 서류 검토를, 학생들은 서류 작성 및 의뢰인 상담보조를 담당했습니다. 조 배정을 마치고 초초하게 의뢰인을 기다리는데 마침 중년의 백인 아주머니와 10살 내외로 보이는 발랄한 남자아이가 같이 오더군요. 처음에는 아주머니가 의뢰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의뢰인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K-Pop(BTS와 소녀시대)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였습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흥얼거리길래 제목을 묻고 나서 영문 곡명이 "Into the World"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고객 기밀유지 의무 때문에 더 자세한 내용은 언급할 수 없지만, 여전히 눈에 선한 한 장면이 있습니다. 서류 작성과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에 의뢰인 서명란에 새 이름으로 서명해야 했는데, 아직 새 이름으로 서명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면서 제 노트를 빌려서 여러 번 새 이름을 필기체로 써 본 후에야 숨을 고른 후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느릿느릿 꼬불꼬불 서명을 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앞으로 그 이름으로 서명해야 할 테니 열심히 연습해 둬"라고 말하면서 뭔가 가슴 한편이 훈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니 토요일 하루쯤은 이런 의미 있는 일에 쓰는 것도 괜찮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종종 더 참여해야겠습니다.
글: 김정균 변호사 (버지니아/DC/뉴욕 주 변호사)
대표 변호사 Ballston Legal PLLC (http://www.ballstonlegal.com)
대표 강사 Meta Law School Coach LLC (http://www.metalawcoa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