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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h Han 한승환 Dec 23. 2016

[썰]장애인 활동보조인 - 바우처




  


활동보조인과 장애인


20대 초시절, 장애인 활동보조인이라는 직업으로 일을 한 적이 있다.


가까운 지인분 중 불편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의 보호자가 나에게 제안을 했고 기본적인 간병일은 미리 배워두자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는 많이 보편화된 개념이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활동보조인이라는 개념이 막 생겼을 때였던 것 같다.


아마 1기 활동보조인으로 활동을 했던 것 같은데, 이러한 활동보조인을 '바우처'라고 칭했다.



                    

<당시 기초교육을 수료하고 발급받은 바우처카드>




당시 시급이 4천원 가량이었는데, 바우쳐는 8천원 가량이었으니, 나름 고가알바였던 셈이다.


장애인은 나라에서 보조금도 받지만, 보조시간도 지급받게 된다. 장애 등급에 따라 작게는 수십 시간부터 많게는 백시간 이상까지 매월 활동보조인을 고용할 수 있는 국비지원 시간을 배당받는 것이다. 해당 시간만큼 보조인을 고용하여 사용하게 되고, 보조인은 그만큼 국가에서 급여를 받는 형식이다.


활동보조인은 나라에서 제공하는 관련 교육을 이수하고, 케어할 장애인을 배정받거나 직접 당사자와 협의해서 배정여부를 정해야 했다. 대상은 대부분 1~2급 사이의 중증장애인분들이었는데, 본인이 케어했던 2명의 장애인분들(=바우처 파트너)은 모두 척추마비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한 분은 다리가 마비되어, 보조기구를 착용한 채 골반 반동으로 걸음마를 간신히 하던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오른손 손목과 목 위만을 사용할 수 있었던, 말 그대로 머리만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두 분 모두 상당한 중증 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장애우라는 표현을 더 좋은 표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장애인'이 공식적으로 등록된 정식 표현이며 '한국장애인총연'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며 주장한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 정립의 핵심부분이다. 장애인들 스스로도 장애우가 아닌 장애인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장애인 집단은 대체로 자존감이 매우 강한 집단이고 사회적인 동정여론을 싫어한다.]



                    

<한국장애인총련의 성명서>



약 6개월 간을 장애인관련 단체와 접촉하고, 장애인분들을 케어하고, 단체행사 등을 도우며 느낀 것은, 장애인집단은 사회적 온정이나 지원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존중과 또한 다른 이들과 동등한 위치로써의 대우를 원한다는 것이다(물론 실제로도 다른 이들과 동등한 것이 맞다).


그럼에도 현실은 가혹하다. 실제로 장애인들은 사회적 도움과 온정의 손길 그리고 복지가 필요하다. 특히 중증 장애인들은 생활상 불편함이 매우 크기 때문에 사회적복지가 불가피하다. 몇몇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사고 이전의 건강하던 신체를 잃고 한 순간에 침대에만 누워있는 무기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적이 되기 때문에 자존감에 극도의 상처를 받게 되고 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하는 것이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경험은 자존감을 황폐화시키고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대부분의 척추장애는 교통/군복무/운동과 같은 매우 활동적인 일을 하다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중증 장애인분들 중에 활달했던 분들이 많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좋지만, 잘 풀리지 않고 자존감이 낮을 때에는 같은 말도 더 쉽게 상처로 다가오곤 한다.


활동보조인 본인이나 이들을 평생 보필해주어야 할 가족들에게도 이러한 짐은 가혹하다. 개인적으로 초중증 장애인분들을 보조하면서 여러 가지 부면에서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평소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일도 그렇지만, 누군가를 보조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많은 답답함과 기다림을 수반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분들을 친하게 생각하며 잘 따랐고, 가까워지면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기에 본인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과 추억으로 남아있다.







했던 일


두 번째로 언급된 초중증 장애인인, 오른손 손목과 목 위만을 사용할 수 있던 형님과 진행했던 일들이 기억나는데, 대부분 장애인이 아닌 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일들이었다.


하는 일은 대부분 몸의 청결과 관련된 것, 식사를 챙겨주는 것, 한 번씩 산책을 가거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특히나 형님으로 잘 따랐던 분의 집에는 격일로 방문하고 샤워를 시켜드렸는데, 60KG 이상의 몸을 다치지 않도록 그대로 들어서 화장실에 미리 펴둔 메트 위로 옮겼고, 그곳에서 비누칠을 하고 씻겨야 했다. '초중증 장애인'들의 경우,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보니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고 약해지는데, 그래서 살가죽이 벋겨지지 않으려면 부드럽게 힘조절을 잘해야 했다.


또 배변의 경우, 소변은 미리 소변줄을 연결시켜두거나 소변 받이를 대어 그때그때 보고 나중에 모아서 처리를 할 수 있는데, 대변의 경우는 즉시 화장실로 옮겨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마무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해주어야 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의 비위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매일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등 쪽에 습기가 고이고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썩게 되는 '욕창'이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1~3시간 간격)으로 몸을 뒤집거나 옆으로 누여주어야 한다. 식사는 물론 떠먹여 주어야 하고 양치도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간단하면서도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수적인 부분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을 보며 정말 안타깝고 미안한 감정이 들곤 했다(심지어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절망적이고 슬픈 마음이 들었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그러한 어려움을 훌륭히 견뎌내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따금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장애인용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였다.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오른쪽 손가락으로 스틱을 조종해서 이동을 했었다. 시골이었는데, 오솔길을 지나고 도로를 건너서 공원으로 산책을 다니곤 하였다. 이 분은 가족들이 산책을 잘 시켜주지 않았었는지, 내가 있어야만 산책을 나오곤 했고 그럴 때마다 아이처럼 즐거워하셨었다. 하지만 산책 시에도 역시 배변이 문제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외출을 하기 전에는 소변줄을 달고 나오게 되는데, 중간에 소변줄에 소변이 가득 차거나 매듭이 풀어지는 경우 다시 달아주어야 했다. 그럴 때면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빠르게 소변줄을 갈았던 기억이 난다.

'복지차량'을 운전했었는데, 스타렉스와 같은 중형밴의 트렁크 부분을 개조하여, 전동 도르래를 달고, 장애인이 전동휠체어에 탄 채로 도르래에 올라서면, 도르래가 위로 이동하여 장애인이 휠체어에 탄 채로 트렁크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러한 밴을 통해서 당시 장애인관련 협회에서 일을 하시던 형님의 출퇴근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나의 바우처 파트너들  


위에 언급했던 형님은 중증 장애인 치고는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신 편이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과 음성인식 장치를 통해, 컴퓨터를 사용해서 게임도 하고 책이나 기사도 읽고 주식까지 하시곤 했다(심지어 주식으로 꽤 버셨다!). 여러 모임에도 참석을 하고, 장애인 인권운동에도 앞장서는 활동가였다. 그리고 심지어 장애인 관련 협회에서 총무업무를 보았는데 엑셀까지 다루곤 하셨다. 형님을 볼 때마다 상당한 동기부여가 되었었는데, 매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진 여건에서 가능한 일들을 꾸준히 찾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생을 허비하기에 바빴던 나로서는 많은 부분을 깨우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다른 형님 한 분은 인상이 상당히 험상궂은 분이었다. 왕년에 생활을 조금 하셨었다고 들은 것 같다. 이 두 분 형님 모두 공교롭게도 오토바이를 타다가 자동차와 경미한 사고가 났었는데 사후 처리를 잘못해서 척추에 문제가 생긴 경우였다. 이 분은 척추환자 치고는 심지어 골반 위로 모두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때로는 다리도 미세하게 움직이며 재활훈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온건한 상태였다. 이 분에게는 재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마사지를 자주 해드려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함께했던 기간 동안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매번 갈 때마다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라면을 끓여주시곤 했다. 당시에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분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리는 도중에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묻자 그림에서는 머리숱이 많아 보이고 젊어 보이게 그려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거의 2시간가량을 꼼짝없이 그려서 초상화를 완성했고, 이분은 뭉클하셨는지 눈물을 보였다.


나의 경우는 두 파트너분 모두 건강하고 바른 심성을 가진 분들이었고 많은 자극과 기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두 분 모두 매우 정신력과 자존감이 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사고를 당하기 전에 찍었던 젊은 날의 멋진 사진들을 보며 회상에 잠기고 슬픈 기색을 보이기도 했고 그런 심정이 공감되어 더욱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다. 일부 장애인들은 '일반인'을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건 맞지 않고 오히려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라 아직 장애인이 되지 않았을 뿐 언제든지 장애를 얻을 수 있는 '비장애인(예비장애인)'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장애인들과 더욱 공감하고 교감해야 하고 또한 자신이 장애를 겪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정말 누구에게 건 언제든지 사고는 찾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고질적인 문제들


사실 고질적인 문제들이 몇 가지 있다. 고질적인 문제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히 제도를 조금 개선하거나 일부 수정을 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

일반적으로 활동보조인은 시급이 높지만, 홍보가 잘 되어 있지 않고 3D업종이라는 인식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남성들의 경우 제대로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직장을 원하고 누군가를 보조해준다는 것을 심정적으로 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활동보조인은 중년의 여성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남성이라는 데에 있다. 중증장애의 절대다수가 군대에서 비롯되며 그 외에도 활동적인 부분에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이 필요할 정도의 중증장애이라면 대부분 남성인 것이다.


사실 활동보조인의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장애인들을 들고 나르고 씻겨주고 케어해주는 부분들인데, 여성의 경우 이것이 불가능하다. 밥을 먹이고 양치를 해주는 소극적인 보조의 수준이며 가족의 도움을 받아 함께 대상을 옮기고 샤워를 해주는 정도이다.


게다가 샤워나 대소변 처리의 경우, 남성 장애인들이 여성활동보조인들에게 그대로 치부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도 남성 장애인들의 경우 매우 불편한 부분 중 하나이다.


활동보조인 시장에서 남성에 대한 수요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요가 구조상 메워질 수 없다는 데에서 첫 번째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높은 급여와 정기적인 출퇴근 구조로 안정된 수익을 주는 '직장'의 개념이 되어야 남성 활동보조인의 필요를 맞추어 줄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현재로써는 쉽지 않아 보인다)


둘.

장애인들이 국가로부터 받는 국비시간에 대한 사용을 철저히 관리/감독하기가 어렵다.


중증장애인의 경우, 어차피 많은 경우 가족들이 함께 상주하며 대부분의 보조업무를 이미 하고 있다. 따라서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에게는 100시간을 일했다고 허위증빙을 해주고, 국가에서 시간당 8천원 상당의 돈을 입금받는다. 이 돈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활동보조인에게 일부 주고, 나머지는 리베이트 방식으로 본인 주머니로 챙기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일부 업자의 경우, 아예 장애인들 수 십명과 합작하여 대규모로 이러한 돈세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의 업무에는 단지 출퇴근이 아니라 장애인이 필요할 때 외출을 함께하거나 심지어 잠을 같이 자는 것도 포함되며, 이러한 부분들도 정산을 되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활동보조인의 업무적 장소나 시간적인 부분이 매우 자유롭고, 그래서 더더욱 관리/감독이 어렵다.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과 대안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후  


활동보조인(바우처)으로 활동한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초중증 장애인 형님은 이따금 찾아뵈었었는데, 지난 몇 년간은 너무나 바빠서 아예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월을 겪으며 여러 종류의 삶의 군상을 보게 된다. 어떠한 삶이 옳은지, 어떠한 삶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 삶의 모습과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때로는 내 의지로, 때로는 강제로 삶의 모습을 할당받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과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열정을 불태우고 지금보다 한 치라도 더 나은 자신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바우처로 활동한 약 반년 간의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처음 누군가의 뒤처리를 해줄 때의 감정,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고난에 세워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웃음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 그리고 그런 이를 내 개인적 관심사를 위해 떠나야 했을 때의 감정 등은 매우 새로운 것들이었고 정확히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오래 남는 기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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