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어 앞에 진땀 흘림
요새 라테 아트를 해보려고 조금씩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사실 라테가 나갈 때 꼭 그림을 그려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 다하는데 나라고 못하랴!'라는 심보로 다시 해보는 중이다 (이제 금세 더워져서 따듯한 라테의 계절이 끝나간다는 게 함정).
본래 하던 스타일에서 조금 다른 형태로 해보는 중 급작스럽게 따듯한 라테 주문이 들어왔다. 그것도 외국인이. 나는 스스로 커피 전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격 대비 최대한 최상의 커피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원두도 저렴한 걸 쓰지 않고 기본 투샷에 무엇보다 가격도 저렴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손님이 커피를 시켰을 땐 최대한 드린 다음에 마시는 걸 눈치껏 확인하게 된다. 맛이 어떤지. 입에 맞는지 몹시 궁금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격이 저렴해서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다들 의외로 높은 만족도를 보여주셔서 감사한 편인데, 그래서 한 발 더 나아가 별 것 아니지만 라테 아트를 도전해 본 건지도 모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연습으로 평소의 루틴이 깨져버렸다는 걸 외국 손님의 라테를 만드는 중에 알게 되었다. 당연히 본래 내 스타일도 연습 중인 스타일도 아닌 어정쩡한 라테가 나와버렸고, 다행히 손님이 한참 구경 중이시길래 재빨리 한 잔을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두 번째 잔도 내 마음에 썩 들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돈 주고 판매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정상적인 라테였지만,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 버전이라 계속 마음이 쓰였다.
아마 여기서부터 좀 여유를 잃었던 것 같다. 가게에 비교적 자주 외국인 손님들이 방문하는 편인데 다들 나를 배려한 영어를 사용하셔서 커뮤니케이션에 크게 어려움을 겪은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번역기나 손짓 발짓을 섞지 않고도 영어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했는데, 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질문들이 나와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커피를 주문하시고 찾는 아이템이 분명하셨던 분들께서는 본인들의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배려가 부족한 오리지널 영어를 나에게 너무 자연스럽게 건넸다. 하나 다행인 건 그래도 말은 다 알아 들었는데, 몇 가지 대답이 도저히 영어로 떠오르질 않는 거다. 별로 어려운 말은 아니었으나 이걸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지 한 번도 생각해보거나 말해본 적이 없는 터라 턱턱 막혀버렸다.
지금까지 외국인과 대화를 하게 될 때 단 한 번도 한국말로 말해 버린 적은 없었는데, 너무 답답하니까 결국 우리말이 나오더라. '아, 이거 각각 안에 다 쓰여있어요', '아... 그러니까' 등등. 여기서 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다행히 그다음부터는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서양분들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마니아였는데, 아마 본인들도 놀랐을 거다. 대한민국 서울도 아닌 군산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일본판 예전 오리지널 팜플렛을 구하게 될 줄은 말이다. 그래서인지 살짝 흥분한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나에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아나며 상기된 채 물었다. 내가 안다고 했더니 '폼포코 이즈 어메이징 무비!'라고 말하는데 정말 이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굴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나도 조금 전까지의 영어 대화 답답함을 깨끗이 잊고 나도 모르게 '아이 러브 지브리 스튜디오 무비, 마이 닉네임 이즈 아쉬타카. 유 노?' '프린세스 오브 모노노케'라고 말하며 대화를 더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정말 다행히 이분들이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곧 결제를 하고 가게를 나섰기에 망정이지, 여기서 지브리 영화 가지고 대화를 더 했다가는 또다시 턱턱 막히는 시점이 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설령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신나게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조만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나 다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