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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Aug 27. 2019

77. 다시 8월의 크리스마스

그렇게 1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참 좋아하는 영화다. 한국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을 때마다 한 손에 자주 꼽히곤 하는 영화인데,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이기는 했지만 내 삶과 이렇게 깊은 연결고리가 될 줄은 1년 전만 해도 몰랐었다. 


군산을 수년 전 처음 오게 된 이유도 물론 이 영화 때문이었다. 짬뽕도 먹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초원사진관을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떠난 군산 여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지. 바로 초원사진관 5분 거리에서 가게를 하게 될 줄은, 회사가 아닌 자영업자가 될 줄은, 아무 연고도 없는 군산에 자리 잡게 될 줄은 말이다.


엊그제 8월 25일은 마이페이보릿이 문을 연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앞 뒤로 며칠 여유가 있었는데 일부러 8월의 크리스마스인 25일에 맞춰 문을 열었었다. 1년이 지나 스치듯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려 보니 새삼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아주 구체적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상권 조사도 하고, 동네를 면밀히 살핀 뒤 결정을 할 것 같은데, 1년 전 군산 그리고 지금의 가게를 결정하게 되는 데는 막상 별다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급작스럽게 생각할 수 밖에는 없었는데, 실제로 아주 빠른 시간에 결정했고 가게를 계약했고, 이사도 했다.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세 가족의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뀌는 일인데 어쩌면 그렇게 막(?)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1년이 지나고 보니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다지 자세한 상권 조사 없이 그저 '아, 거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이런 목조 건물에서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딱이다 싶었다'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결정한 것 치고는 상권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고, 군산이라는 도시의 성장도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빨랐다. 돌이켜보면 구체적인 상권 조사 등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성격상 구체적인 조사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이런 큰 결정을 결코 쉽게 할 수 없다는 걸 (조사를 깊게 하면 할수록 결정은 더 어려워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한 번 저질러 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비교적 쉽게 결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운이 좋음을 실감한다. 운이 나쁠 수도 있었으니까.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치고는 아주 빠르게 적응했고 별다른 큰 문제도 없었고, 예상보다 잘 안된 일들보다 그래도 잘 풀린 일들이 더 많았다. 매출 관련된 부분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생활비 등 소요되는 예산 관련한 부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줄어들었다. 정말 운이 조금이라도 더 나빴더라면 훨씬 더 고된 시간이었을 거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1년이라는 시간이 다이내믹하게 흘러갔다는 거다. 천천히, 적당히 가길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는데 그로 인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들여 깨닫게 될 일들이나 알게 될 정보들을, 더 짧은 시간을 들여 얻을 수 있었고 그만큼 경험치를 집약해서 얻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아찔하게 탔던 롤러코스터가 장사를 하는 데에는 확실히 단단한 내성이 됐다. 


앞으로 또 한 번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 텐데, 그땐 또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지 기대와 걱정이 든다. 그땐 지금보다 좀 여유가 더 생겼으려나 (금전적 여유도...). 아니면 더 치열하게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려나. 아니면(어쩌면) 또 다른 곳에서 마이페이보릿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지난 1년간 운이 좋았음을, 잘 버텨왔음을 스스로 끄덕이고 토닥이며 보내는 8월의 크리스마스다. 


한석규, 심은하 씨는 이 사실을 알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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