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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Jun 04. 2021

112.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지 뭐야

조금 특별한 가게를 지방에서 운영하다 보니 종종 인터뷰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자주 듣게 되는 것 중 하나가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같은 질문이다. 그 질문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라고 답하거나,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나가려고 해요'라고 답한다. 후자는 좀 더 초심에 가깝고, 전자는 좀 더 현실적인 측면이 반영된 대답이다. 


이런 가게 운영의 중요한 기준점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요즘 들어 종종 흔들릴 때가 있다. 처음엔 영화 굿즈샵으로 컨셉에 맞는 제품들을 판매하면서 영화 음악들로만 바이닐(LP)을 취급했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 내 취향이 적극 반영된 OST 외 다른 장르의 바이닐들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고 바이닐 판매의 비중이 늘어가면서 점차 조금씩 장르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몇 달 전부터는 근래 꾸준히 발매되고 있는 가요 앨범들도 조금씩 취급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영화음악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고, 다른 장르 앨범들도 내 취향의 음악들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국내 LP 시장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전체적으로 시장의 규모나 제작사의 수요 예측이 면밀하게 돌아가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소매점은 발매를 몇 달이나 앞둔 상태에서 미리 수량을 예측에 주문을 해야 될 때가 많다 (대부분이다). 어떤 앨범은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미리 주문한 수량조차 부족하게 입고될 때도 있고, 어떤 앨범은 적은 수량의 한정반으로 기획됐으나 발매 후에도 한참이나 시장에 남아있기도 한다. 이렇게 불확실성이 높고 몇 달이나 전에 주문 수량을 확정해야 하는 것에 반해, 반품 불가 조건이 대부분이라 위험도는 더 높아진다. 


이렇게 몇 달 전에 하는 대략적 판매량 예측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아직도 보수적으로 주문하는 편이라 실패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만큼 한 번의 실패 (쌓이는 재고)는 큰 손해가 된다. 최근 들어 이런 식의 주문을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더 압박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압박과 정반대로 항상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린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앨범은 더 많은 수량을 확보하는 것 자체로 엄청난 경쟁력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수량을 이른바 '땡긴'다면 발매 뒤 많은 판매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좀 애매한데..'라며 적은 수량만 주문했던 앨범이 모두가 구하고 싶어 하는 앨범이 되어 너무 적은 수량만 주문했던 걸 후회하는 일도 있었고, 야심 차게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량을 주문했으나 너무 기대 이하의 판매라 낙담했던 적도 있다. 요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일을 겪으며 좀 더 뚜렷해진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가게를 운영하며 자주 강조했던 '좋아하는 것' 즉 취향에 관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수요 예측이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측이 틀렸을 때, 그래서 많은 재고를 떠 앉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남게 된다. 이 지점에서 취향이 중요해진다. 단순히 잘 팔릴 것을 예상해 주문했으나 그렇지 않았을 경우엔 가격을 할인하거나 특별한 판매 기회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사실 마땅한 방법이 없다. 하지만 동일하게 수량 예측이 빗나가 많은 재고를 떠 앉게 되었을 때도, 만약 잘 팔릴 것만을 예상해 주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앨범, 이 가게의 컨셉에 정확히 맞는 앨범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제품은 설령 당장 많은 판매를 기록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반드시 다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제품)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 더 나아가 설득하고 싶다는 (왜 이 좋은 걸 몰라!) 욕망이 꿈틀댄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하는 제품들은 설령 재고가 많아지더라도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설득할 만한 자신도 있고, 설득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능력(애정)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요 근래 아주 조금 취향을 벗어나거나 잘 판매될 것만을 예상해 주문했던 LP들 중 몇몇의 판매가 부진한 걸 보고 이렇게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됐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것이 기준이지. 하마터면 초심을 잃을 뻔했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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