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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Sep 27. 2021

오징어 게임

공정하다는 착각


오징어 게임 (Squid Game, 2021)

공정하다는 착각


'도가니'와 '남한산성' 등을 연출했던 황동혁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 즐겨했던 (여기서 어린 시절이라는 것도 아마 8,90년대생 까지만 어느 정도 통용되지 않을까 싶지만) 놀이인 '오징어 게임'에서 빌려온 제목으로, 어린이들이 즐길만한 단순한 게임 하지만 인간 본성의 민낯과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다. 


극의 종말에 가서야 알게 되는 미스터리한 배경과 단순한 게임으로 진행되는 잔혹한 서바이벌, 그리고 사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참가자들이 겪는 갈등과 인간성에 대한 고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아주 강력한 사회적 현상과 메시지를 단순한 게임 구조와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냈다. 그래서 흥미롭고 또 불쾌한 동시에 그 생각의 화살을 보는 이에게 돌려주는 구조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장르적 오락물에 그치는 드라마가 아니라 관객에게 생각하기를 강요하는 작품이다. 게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게임의 구조와 승패의 치밀함 혹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세계관의 완성도로 재미를 주려는 것이 목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그 안의 메시지를 관객이 듣고 한 번 더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목적을 가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그 목적을 제대로 달성했는가 혹은 그 과정에 스스로 함정에 빠진 부분은 없는지에 대해 꼭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작품 스스로가 그저 재미만을 위한 오락물, 장르물에 그치길 원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불편한 부분들은 대부분 의도된 것이다.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면서 '너라면 다를까?'라는 질문을 던지거나,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부분들을 표식 화해 특별하고 비현실적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지고 보면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와 그들이 처한 상황, 또 게임 중간에 벌어지는 일들 모두가 그렇다. 특별한 상황에 놓인 판타지 같지만, 그 게임의 무대만이 판타지적일 뿐 나머지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상황들, 그리고 성별, 인종, 나이 등 현실에 가득 존재하는 혐오와 차별들까지. '오징어 게임'의 인물들은 각각의 혐오와 차별, 현실을 대변하는 (몹시) 스테레오 타입화 된 캐릭터들이다.


이렇게 수많은 현실의 부조리를 불편함을 강조해 가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은데,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때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각종 혐오와 차별들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스테레오 타입으로 부여하다 보니, 그 성격을 넘어서는 범주의 상황으로 확장될 때 일종의 소수의견을 대변하는 캐릭터 스스로도 또 다른 차별과 혐오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건 의도했거나 실수라기보다는 크게 의식하지 않고 넘겼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오징어 게임'의 캐릭터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몹시 전형적이며, 완벽하게 세팅된 캐릭터 게임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부여받는 성격과 역할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우선시 되는 에피소드나 장면들에서는 메시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장점이 되지만 반대로 그 외 생각의 여지가 있는 장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사실 혐오와 차별의 문제성을 말하고자 하면서 그 화자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설정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일정 계층이나 인종, 성별 등을 대중들이 흔히 인식하고 있는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차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선입관을 더 확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불법 체류를 통해 공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를 묘사할 때, 우리가 얼굴이나 대사 한 마디만 들어도 그 캐릭터가 처한 현실을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형태로 묘사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대중이 인지하는 그 계층을 대표할 만한 특징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편견을 문제 삼는 이야기라면 모순이 된다. 다른 캐릭터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서울대 수석에 잘 나가는 회사원이자 동네의 자랑인 캐릭터나, 실직한 파업 노동자로 놀음에 빠져 이혼당하고 백수처럼 지내는 캐릭터, 결국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범죄에 손을 뻗힌 탈북자 등의 캐릭터도 이렇게 설정하는 자체가 일종의 선입견이자 편견이라는 점을, 적어도 그 편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작품에서는 쉽게 넘겨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이러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 '공정하다는 착각'과도 바로 연결된다. 극 중 게임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자들은 물론, 참가자들 조차 목숨이 달린 일각의 순간에도 아무 말 못 하고 수긍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게임에 참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잖아. 모두 스스로 참가한 거잖아'라는 말이다. 이 게임을 설계한 자들은 우린 게임을 설계했고 참가자를 초대했을 뿐 게임에 참여한 것은 모두 참가자 본인의 의지였고, 또 게임 자체는 모두에게 공정한 형태로 진행된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그 공정함을 해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또한 참가자들조차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네가 자발적으로 참가했잖아'라는 되물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수긍하고 만다.



하지만 이 공정이 공정이 아님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죽음의 게임(하지만 엄청난 돈을 얻을 수도 있는)에 참가한 자들은 결코 완전한 자기 의지만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이미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그러니까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과연 자발적 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되물어 볼 수 있다 (물론 대답은 '아니다'다). 즉, '오징어 게임'의 세계는 '잔혹하고 비정하지만 공정한 건 맞아'가 아니라 그 세계 자체가 공정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모순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그 점에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흥미롭고 생각해볼 여지를 자극하는 작품이기는 했지만, 작품 스스로도 그 착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도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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