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괴롭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 속 예언자들이 있다. 혹은 아주 용하다는 점쟁이들이 있다. 수십 년, 수백 년 뒤에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놀랍기만 한데, 사실 그들의 예언 가운데는 틀린 것들도 많다. 적중률로 따지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세상은 대부분 몇 번의 적중된 예언들 만을 기억한다. 특히 적중률과 상관없이 그 횟수가 여러 번이라면 더더욱.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심정은 알 수 없지만, 완벽을 추구했던 예언자들이라면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아, 더 적중률을 높였어야 했는데...'
요즘엔 나도 자주 예언자가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바이닐 붐이 일면서 판매량이 많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분명 사향 산업에 가까웠기 때문에 관련 생산 공장들의 수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 적은 수의 생산 공장들은 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고 여기에 코로나 19라는 팬데믹 상황까지 겹치면서 공장 가동률은 더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기 몇 달 전부터 각 도매상들을 통해 예약주문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매 몇 주 전 정도에 도매상들에게도 예상 수량을 예약받고, 그 뒤 일반 고객들에게도 예약주문을 받아야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가끔은 몇 달 전에, 또는 반년도 더 전에 예약 주문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게 됐다.
몇 주 정도라면 업자의 감으로 수요와 공급을 예상해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겠지만, 반년 가까이 발매가 남은 제품의 수요를 예상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간극을 예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이 어떤 외부 요인들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변수도 예상해야 하는 것이 골치 아픈 일이다. 이건 단순히 수요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예언에 가깝다. 실제로 코로나 발생 전에 주문했던 바이닐이 코로나가 갑자기 발생하면서 몇 달이나 발매가 연기되어 판매 타이밍을 놓쳐버린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을 일반 소상공인이 어떻게 예상한다는 말인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노스트라다무스도 다 맞춘 건 아니라고).
그렇게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한참 전부터는 설령 없어서 못 파는 한이 있어도 발매일이 오래 남은 제품은 주문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는데, 오늘 미지(?)의 택배 상자를 받고는 잠깐 상념에 휩싸였다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 것 같기도 하다). 박스만 봐서는, 아니 주문한 거래처의 명을 보고도 얼핏 무슨 제품을 시켰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주문했던 바이닐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희미한 기억 속에 있는 제품이 도착했을 땐 메일함을 검색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올해 초에 주문 마감이어서 부랴부랴 주문했던 제품이 연말이 다되어서야 발매되고 도착한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이 정도로 많은 수량을 주문하진 않았을 텐데,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책장 뒤에서 책을 움직여 떨어뜨려 서라도 주문 수량을 줄이라고 경고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도 다 결과론적인 얘기다. 가끔은 지금의 나보다 배포 있게 주문했던 과거의 나 덕에 다른 곳에서는 재고가 없어서 못 파는 제품들을 여유 있게 파는 경우도 있다 (가끔이지만).
제품 판매도 대부분은 타이밍이 아주 중요한데, 모든 판매나 홍보가 그렇듯 초반에 그 제품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SNS를 통해 입고 소식을 처음 알렸을 때 몇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판매가 일어나느냐가 판매량의 대부분이 되기도 한다. 바로 반응이 오면 그 이후에도 비교적 손쉽게 재고를 소진할 수 있지만, 첫 시도에 반응이 별로 없으면 아주 오랜 기간 이 재고 때문에 고통받기도 한다.
조금 전 그렇게 오래전 주문했던 제품의 입고 소식을 SNS에 올렸고, 스토어를 계속 새로고침 중이나 별로 반응이 없다. 이번 예언은 실패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