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이야기란 무엇인가
디즈니 픽사의 신작 '메이의 새빨간 비밀 (Turning Red, 2022)'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춘기 소녀들의 보편적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에 아주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주인공 메이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중국계 소녀(이민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점조차 이 영화에선 특별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즉, 이민자로서 겪는 어려움 등은 사실이 그러했건 아닌 건 간에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특별하게 묘사되지도 않는 요소를 서두부터 언급한 이유는, 이 작은 차이점조차 특이점으로 묘사되지 않을 정도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배경과 인물, 이야기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왜 '뻔하다'라는 부정적 단어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중립적인 단어를 썼을까. 이런 보편적 이야기를 기다려왔다는 걸 깨닫게 될 만큼, 이 영화엔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수많은 보편성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평범한 주인공을 만난 게, 특히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접하게 된 것이 언제였나 싶다 (깊게 따져보면 처음일 수도 있다). 왕자, 공주, 영웅 서사의 시대를 지나, 평범하거나 루저가 주인공인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전자는 물론이고 후자의 경우도 어느 정도 스테레오 타입 같은 편견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외모나 가정환경 등 어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묘사할 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목표로 더 이상 설정하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하기 위해 아직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편견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낸 섬세하지 못한 연출을 보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즉, '외모가 예쁘지 않으면 어때?'라는 이야기를 하는 과정 중에 '예쁘지 않다는 건 사실이야'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어쩌면 다른 애니메이션 영화였다면 '괜찮아'의 설정으로 언급될 만한 요소들을 아무런 특징적 묘사나 설명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급하는 자체가 편견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의 시선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런 점이 한 번이었다면 '어? 왜 저 포인트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 혹은 '뒷부분에 뭔가 이야기가 연결되겠지'라고 오해할 텐데, 지속적으로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다른 여러 가지 중 하나로 묘사되다 보니 관객 역시 이 특이점에 점점 주목하지 않게 된다. 아니, 특이점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메이의 평범한 체형이 그렇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특히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전체관람가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가치관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작가의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팔다리가 얇고 길고,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작게 묘사되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일종의 지침이나 신호가 될 수 있다. 정반대도 마찬가지다. 뚱뚱한 몸매의 소유자가 자신의 몸매를 불편해하거나, 얼굴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캐릭터들을 쉽게 접하게 되면 어린 관객들은 스스로 기준점을 이런 시선에 맞추게 될 수 밖에는 없다.
이 작품엔 정말 다양한 체형, 아니 다양하다기보다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체형과 얼굴들이 등장하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외모적 언급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진짜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성립한다.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의 방식도 충분히 필요한 (특히 문제라고 온통 말해오던 세상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꼭) 방식이었지만, 지금 2022년에 더 맞는 방식은 후자의 방식이다 (주인공의 어깨 넘어 포커스 아웃된 곳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를 타는 장면, 당뇨병 패치를 붙인 같은 학교 친구 등의 장면도 같은 이유다).
극적 재미를 위해 (그리고 견디기 힘든 귀여운 포인트를 위해) 메이의 신체적 변화를 거대 레서판다가 되는 판타지로 묘사했지만, 극 중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건 노골적인 사춘기 소녀의 신체 변화(생리)의 대한 이야기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내 몸의 변화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라는 원망으로 이어진다. 여성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째서 '나에게만'이라는 원망의 대상이 되는지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건 이 작품에서 제법 중요한 지점이다.
일단 내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나에게만 일어나는 충격과 변화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걸 온전히 감당하는 건 결국 100% 내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 레서판다로 변하는 일이 메이에게만 일어났다면 이건 그저 특별한 일에 휘말린 판타지에 그쳤을 테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 가문의 여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축복(혹은 저주)이라는 설정을 가져와 여성의 이야기인 동시에 가족의 이야기로 현실성을 확보한다. 결국 레서판다라는 건 생리에 대한 비유일 수 밖에는 없는데(원제인 Turning Red를 생각하면 더 직접적이다), 여기서 영화는 여성과 가족, 그리고 우정이라는 테마로 연대를 그린다. 그리고 이 연대에는 무엇보다 공감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메이의 아버지와 나중에 결국 포타우너로 하나가 되는 타일러도 이 여정에 함께하지만, 신체적 변화를 함께 겪고 공감하는 엄마와 할머니, 이모와 친구들이 공감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점도 이 때문이다).
중국계 이민자 출신 감독인 도미 시의 자전적 이야기에 가까운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누구나 겪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 재미를 더하면서도 그저 재미만 추구하는 오락영화에 그치지 않았다. 보편적 이야기라는 것이 비유를 거치는 과정 중에 재미를 위해 훼손되거나 중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더해진 요소가 본래의 보편성을 더욱 강하게 어필하는, 그래서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나와 주변의 것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무해한 진짜 전체관람가 영화로 내 아이에게도 몇 번씩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물론 같이 봤다).
* 극 중 등장하는 보이밴드 '포타운'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연상되는 콘셉트이지만 정작 감독은 샤이니, 빅뱅 등 케이팝 아이돌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도미 시의 초기 만들었던 아주 짧은 동영상 클립 역시 샤이니의 '링딩동' 음악이 배경이었다. 그리고 이 포타운의 음악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빌리 아일리시와 그의 오빠이자 프로듀서 피니어스 오코넬의 작품이다.
* 영화를 보고 나서 알게 되었지만 도미 시는 이전 아카데미를 수상하기도 했던 단편 애니메이션 '바오 (Bao, 2018)'의 감독이기도 했다. 이 작품도 참 (충격적으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역시는 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