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새 시대의 뮤지컬
'해밀턴 (Hamilton)'이라는 뮤지컬이 연일 화제라는 뉴스를 본 게 2015년, 2016년 정도니까 벌써 6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좀처럼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던 터라 답답했었는데, 물론 직접 공연을 관람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디즈니+ 에 공개가 되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자막이 업데이트되면서)이 지난 화제의 뮤지컬 공연을 드디어 보게 됐다. 이미 세상에 나온 지 6년이나 지난 뮤지컬 공연을 두고 '새 시대'에 걸맞은 뮤지컬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제야 접하게 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해밀턴'은 듣던 대로 새 시대의 뮤지컬이었다.
미국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의 입장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인물은 다소 생소하거나, 어설픈 지식이 전부일 수 밖에는 없을 거다. 조지 워싱턴 시절 미국 최초의 재무장관이자 1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정도의 지식이 전부였는데, 물론 미국 건국 역사와 여기에 주요 인물들에 대한 사전 이해가 있다면 훨씬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는 뮤지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이해가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봐도 뮤지컬 '해밀턴'은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텔링 (물론 스토리 자체는 진부한 편이다)과 무엇보다 획기적인 힙합/랩으로 구성된 노래들로 인해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해밀턴'의 음악이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공연보다 음악을 훨씬 더 먼저 접하고 즐겨 듣게 됐다. 그래서 이미 힙합/랩 음악과 미국 건국의 스토리가 뮤지컬로 잘 어우러질까 하는 우려 자체가 없었지만, 아마 처음 이런 설정을 듣게 되었다면 기대보다는 우려가 훨씬(훨씬) 컸을 거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도의 다른 작품이나 공연들을 봤을 때 기대에 충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나이에 전혀 걸맞지 않게 젊은 감성을 따라 하겠다고 어울리지 않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뒤로 쓴 뒤 말 끝마다 '~요'를 붙여대는 모습처럼 말이다. 뮤지컬 장르에 힙합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크고 작게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은 완전 힙합이 되거나,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공존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해밀턴'은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스토리와 배경(의상) 위에 힙합/랩을 입었음에도 바로 몰입이 됐다. 연출과 연기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에는 역시 음악 자체가 좋았던 이유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공연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뮤지컬 수록곡들을 듣게 되었는데, 곡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오죽하면 그 해 가장 뛰어난 랩 앨범이 어떤 뮤지션의 앨범도 아닌 '해밀턴' 사운드트랙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으니. 뮤지컬 장르에 일반 관객이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노래로 전달되는 대사의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일 때가 많은데, 어쩌면 '해밀턴'처럼 랩으로 전달되는 대사들이 더 효과적으로 이 어색함의 경계를 허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의 스토리텔링과 랩 음악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이자 이 작품이 새로운 시대의 뮤지컬로 평가받는 이유는, 직접적인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역사 속 백인 인물들을 유색 인종 배우들로 캐스팅하였으며,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민자 신분을 강조하면서 현대 미국의 사회문제이자 근본 이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주연을 맡고 작사, 작곡, 극본을 쓴 린 마누엘 미란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다름 아닌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최애작 '틱, 틱... 붐!'에서였다. 린 마누엘 미란다는 '틱, 틱... 붐!'을 연출했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 빌보드 차트 및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애니메이션 '엔칸토'의 주제곡인 "We Don't Talk About Bruno"의 가사와 작곡을 맡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하나씩 찾아보면 그동안 좋아했던 여러 작품들 속에서 린 마누엘 미란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배우, 감독, 음악가, 프로듀서 등 다재다능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해밀턴'을 보고 나서 린 마누엘 미란다의 이름을 따라 한 두 가지씩 가지를 펼쳐나가는 여정도 추천한다.
* 최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아리아나 드보스가 이 공연의 앙상블로 출연한다.
* 수많은 곡들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Help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