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하며 나아가는 삶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불안을 두 남녀의 이야기로 담아낸 '아사코 (Asako I & II, 寝ても覚めても, 2018)'로 처음 접하게 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그 이후 잠시 잊고 지내다가 긴 러닝타임으로 화제가 되었던 2015년 작 '해피아워 (Happy Hour, ハッピーアワー, 2015)'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32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상업 영화들도 평균적으로 러닝 타임 2시간을 훌쩍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상영시간이 길다는 건 명백한 장단점이 될 수 있는 지점인데, 적어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만든 긴 러닝타임의 작품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수긍할 수 있는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ドライブ・マイ・カー, 2021)' 역시 짧지 않은 179분의 러닝타임이 꼭 필요했던 영화였다.
어떤 영화들은 각자의 이유로 타이틀 롤을 영화가 시작한지 한참 뒤에야 등장시키곤 한다. 형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왜 이 시점에서(이 이야기가 끝난 뒤에) 영화의 제목을 관객에게 말하는지 그 의미를 위해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가 시작하고 난 뒤 거의 1시간이 조금 못된 시점에서야 영화의 제목과 함께 타이틀롤이 시작된다. 이 작품의 경우는 명확한 프롤로그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이 긴 이야기가 영화의 시작에 앞서 사용됐다.
2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영화는 많은 부분을(이야기를) 생략하거나 함축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의 현재 성격이나 상황을 결정짓는 전사(前事)에 해당하는 사건들은 영화 중간에 플래시백 형태로 등장하거나, 대사를 통해 언급되는 형태로 설명되곤 한다. 러닝타임이 한정적인 (그것이 3시간 넘는 러닝타임의 영화라고 해도)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렇게 전사와 과거를 활용하는 방식은 필수에 가깝고, 더 효과적인 선택이다. 그럼 왜 하마구치 류스케는 1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가후쿠와 오토의 이야기를 프롤로그의 형태로 연출했을까. 그건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 사건과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그리고 이 프롤로그에서 조차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자녀의 이른 죽음이라는 사건이 전혀 해결(해결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하나 이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되지 않은 채 주인공 가후쿠는 다음 챕터의 이야기(삶)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가후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객에게 정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점은, 이 일들에서 가후쿠가 어떤 입장을 취했었는지, 그 일들을 어떻게 매듭짓거나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이 영화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일반적인 형식이 아닌 프롤로그의 형식으로 굳이 연출한 것 역시, 아내의 죽음까지의 타임라인을 명확한 한 덩어리로 형식적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되어 연출을 맡게 된 가후쿠는 자신이 이전에 주인공을 연기했었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작품인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한다.
영화는 무대 위에서 실연되는 공연보다 앞선 연습 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여기엔 1차적인 이유가 있는데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실제로 영화를 연출할 때 배우들에게 영화 속 연습과정과 동일한 방식의 대사 리딩을 진행한다고 한다. 즉, 수없이 대사 리딩을 진행하지만 실제 촬영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감정을 넣지 않고 기계처럼 대사 읽기를 요구하고, 실제 촬영을 할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감정을 넣어 대사와 연기를 배우가 하도록 연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평소 자신의 영화 만드는 방식과 태도를 영화 속에 동일하게 그려냈다는 점은, 감독이자 작가로서 자신의 영화 만드는 방식에 대한 깊은 신뢰와 그 방식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함이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수없는 반복으로 완벽하게 대사를 숙지한 상태에서, 처음 감정을 넣어 상대를 보고 연기할 때(만) 발생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표현할 순 없지만 이런 경우에만 우연히 발생하는 거짓 없는 진짜 감정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부딪혔을 때 우연히 발생되는 의도하지 않았던(할 수 없었던) 빛나는 순간들의 힘을 하마구치 류스케는 굳게 믿고 있다. 전작 '해피아워'를 통해서는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이야기를 끊지 않고 최대한 긴 호흡으로 전달하려 애쓰며, 이 작품처럼 어쩌면 처음 딱 한 번만 가능할지도 모를 그 순간의 힘을 믿는 연출은, 어쩌면 가짜일 수 밖에는 없는 영화라는 예술에 진짜를 담아내기 위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태도가 아닐까.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서로 밀접한 관계 혹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구조다.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가후쿠와 아내인 오토, 그리고 오토와 관계를 맺었던 남자이자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에서 바냐 아저씨 역할을 연기하게 된 다카츠키가 같은 사건과 이야기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같은 이야기를 연결하여 들려주는 방식처럼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를 두고 이야기라는 존재 자체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여기에 극 중 극인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 또한 가후쿠의 현실과(그리고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평소 이동할 때 차 안에서 오토가 녹음해 준 대본을 듣는 루틴은, 오토가 떠난 뒤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다시 듣게 되는데, 이때 이 대사 녹음테이프는 더 이상 대사 녹음이라는 의미에만 머물지 않게 된다. 이 녹음테이프는 또 다른 생명(이야기)이 되어 현재의 가후쿠에게 계속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가후쿠의 운전사로 최대한 거리를 유지해오던 미사키의 이야기가 조금씩 가후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면서(그 반대도 마찬가지) 가후쿠는 그동안 자신이 듣지 못했던 아니, 듣지 않으려고 애써 피해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비로소 듣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내게 더 깊은 여운을 준건 이 영화의 결정적인 메시지 때문이었다. 최근 다른 영화를 이야기할 때도 종종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데, 근래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태도 혹은 모토는 체념이다. 반드시 극복하지 않는 것. 극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우리는 너무 쉽게 어려움이나 상처, 장애, 결핍 등에 대해 극복을 말하고, 권하고 자주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선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전달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체념 혹은 인정(순응)하는 것은 곧 포기 혹은 실패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극복해내는 삶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한 삶은 과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타인의 삶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극복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고, 가끔은 극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쉽게 극복을 강요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내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상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애써 무시하려 하거나 나 스스로에게 조차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이야기(상처)는 아물지 언정 사라지지 않고 가끔은 끝내 아물지 못한 채로 남기도 한다. 그리고 무심하게도 삶은 계속된다.
아내의 외도를 눈치채고 직접 목격하고도 전혀 말하지 못하고, 그 이전엔 자녀를 잃은 일에 대해 부부가 서로의 이야기(상처)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으며, 아내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이후에도 가후쿠는 끝내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는 연기할 수 없게 된 바냐 아저씨 역할을 연출하고 부득이하게 다시 연기하게 된 과정 속에서, 자신의 딸이 살아있었다면 같은 나이였을 (유사 부녀관계로만 묘사될 여지가 있었으나 그보다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로 묘사된 점이 더 좋았다) 미사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 가후쿠는 비로소 그동안 피해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게 된 가후쿠는 이제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일까? 그 답은 가장 영화적인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계속 보여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나는 방식을 통해 영화의 마지막 연극 '바냐 아저씨'의 한 장면으로 들려준다. 한국어 수어로 연기하는 이유나가 가후쿠를 뒤에서 안듯이 감싸 수어를 말하는 두 손을 가후쿠의 눈앞에 펼쳐 전하는 대사 장면은, 이 영화가 말했던 바로 그 '무언가 일어나는 순간' 그 자체다. 영화와 관객이라는 관계에서도 그렇고, 가후쿠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가후쿠는 이 순간 바냐 아저씨이자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는 가후쿠이며, 소냐가 전하는 위로의 대사는 곧 가후쿠가 본인 스스로에게 전하는 위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위로는 다름 아닌 체념이다. 영화의 마지막 소냐가 바냐 아저씨에게 전하는 대사에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진심이 담겨 있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