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압도하는 이미지
보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들이 있다. 엔딩의 충격이나 여운이 깊은 영화들이 주로 그렇고, 확고한 이미지(디자인)가선명한 영화들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기억에 잔상으로 남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나이트메어 앨리 (Nightmare Alley, 2021)'도 깊은 잔상으로 기억될 영화다. 국내용 포스터엔 '지난 10년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이라는 문구가 대표 홍보 문구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결코 반전이나 이야기 자체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 가져온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조금씩 본 것 같은 인물과 이야기들의 조합에 가깝고, 반전은 사실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이야기의 충격은 반전에 있지 않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가장 뛰어난 점은 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프로덕션 디자인이다. 사실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이야기(혹은 동화)에 어울리는 전반적인 색감과 톤, 그리고 단순히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30년대 뉴욕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주는 의상. 그리고 디자인의 영역은 아니지만 마치 프로덕션 디자인의 일부인 것처럼 감싸고 있는 음악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완벽하게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응축되어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당시 뉴욕의 화려한 건물과 의상들도 그렇고, 어둡고 축축하고 기괴함이 느껴지는 카니발의 모습에서 일종의 공기가 스크린 밖까지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앞서 이 영화를 소개하며 '잔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보통 '여운'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본래 의미인 시각적 잔상에 가깝다. 2시간 반 남짓의 영화 한 편을 감상했을 뿐인데 마치 여러 시즌으로 구성된 드라마를 모두 감상한 것 같은 잔상이 오래 지속된다.
배우들의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브래들리 쿠퍼와 케이트 블란쳇을 비롯해 루니 마라, 토니 콜레트, 윌렘 데포, 리차드 젠킨스, 론 펄만, 데이비드 스트라탄, 홀트 맥칼라니 등 마치 웨스 앤더슨 영화 못지않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다만 두 주연 배우 외에는 각각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배역들도 많아 조금은 가볍게 소비되는 면도 없지 않다.
이 영화의 캐스팅 소식과 스틸컷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화제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가 '캐롤 (Carol, 2015)' 이후 처음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캐롤 2'가 아니냐는 기대 섞인 루머도 있었는데, 전혀 다른 영화와 장르, 캐릭터로 만난 두 배우였지만 같은 앵글에서 다시 보게 된 두 배우의 모습에서는 묘한 반가움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