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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Mar 22. 2022

126. 자제는 나의 힘

힘내라 나의 자제력!

어 롱롱 타임 어고. 음반, DVD 업계에서 제법 경력을 쌓아오던 나는 적당한 시기에 새롭게 창업하는 온라인 음반/DVD 쇼핑몰의 창업 멤버로 스카우트되었다 (요즘에야 알게 된 일인데, 이게 내 첫 번째 창업 멤버로서의 시작이었다. 블로그 마케팅 업체 창업 멤버로 참여했던 게 처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음). 처음 시작하는 쇼핑몰이다 보니 재고를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2천 년대 중반이던 그 당시도 어느 정도는 재고를 공유해서 100%를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창고에 판매할 제품들을 확보해두던 시절이었다. 


음반 쇼핑몰의 창업 멤버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권이 있다. 대형 음반 쇼핑몰을 보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음반들의 DB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반들을 제로베이스에서 주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근대고 떨리는 일인지! 매주 새롭게 발매되는 음반들을 주문하는 것도 신나는 일인데,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하나씩 채워가는 일이라니, 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중성(잘 팔릴 것)과 약간의 취향을 고려해 주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각 장르의 전문가고 경력자들이어서 커다란 창고를 절반 이상 채우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담당은 DVD파트라 나 역시 당시 발매된 영화/음악 DVD들을 처음부터 기준에 맞춰 주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 역시 누구나 알만한 그래서 누구나 하나씩은 사고 싶은 영화들부터, 조금은 취향의 영화들까지 고르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각 분야의 나름 전문가들이 세팅한 첫 재고 현황은 어땠을까? 물론 초심자들에 비해 나쁜 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오히려 전문가여서 독이 되는 점들이 많았다. 아예 음악이나 영화를 모른다면 철저하게 잘 팔리는 것 위주로 (그것이 꼭 좋다는 건 아니다) 주문하고 또 주문할 때 다른 사람의 잘못된 말에 휘둘릴지언정 조심스러울 수 밖에는 없을 거다. 그런데 그 분야의 전문가나 경력자일 경우 아무래도 자신을 과신하게 된다. 이 경우에서 과신이란 음악을 너무 많이 알아서, 영화를 너무 많이 알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멤버들은 나를 포함해서 정말 음악을 편견 없이 다양하게 듣던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음악에 빠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만 파다가 나중에는 점점 더 매니악하고 어려운 장르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보통은 재즈로 빠졌다가 결국 클래식까지 듣게 된다. 이 당시 멤버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만큼 다양한 장르를 알 만큼은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문제가 됐다. 각 장르의 수많은 명반들을 알고 있다 보니 주문을 할 때 판매 여부와 상관없이 이 명반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 이건 있어야지' '이건 클래식(기본)이지' '이 앨범도 빼놓을 수 없지!' 등등 스스로 양보를 수없이 거듭해도 뺄 수 없는 음반들이 너무 많았다. 영화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고전 클래식부터 최신 영화에 이르기까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영화들만 고르고 골랐는데도 그 숫자(재고)는 결코 적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스로 엄청 보수적으로 주문했다는 점이다. 여유 있게 주문해보자!라는 식이 아니라, 최대한 꼭 있어야 할 것만 주문해야지 하는 식으로 주문했는데도, 너무 좋아하는 음반과 영화들이 많다 보니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몇 년 뒤 퇴사할 때까지 단 한 장도 판매되지 않는 DVD도 몇 장 있을 만큼, 자제하고 자제했는데도 첫 번째 주문의 효율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다들 경력자여서 그런지 창업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이런 경향성을 비교적 빨리 발견하고 고쳤다는 점이다. 


요즘 자주 그때 생각을 한다. 그때의 교훈을 자주 떠올린다. 요즘, 특히 시장성이 좋은 바이닐들을 주문하려고 주문서를 볼 때면 자제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각각이 각자의 이유로 꼭 주문해야 하는 (하고 싶은) 앨범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바이닐은 최근 가장 잘 나가는 앨범이라서, 어떤 바이닐은 한동안 재입고가 되지 않았던 앨범이라서 같이 비교적 상식적인 이유로 자제하기 힘든 제품들도 있는 반면, 롱롱 타임 어고 시절 겪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이 정도는 있어야 하는 앨범이라서' '이건 판매 여부와 상관없이 소개할 의미가 있는 제품이어서' 등 범휴머니즘의 세계관에 걸맞은 이유를 가진 제품들까지. 주문서의 리스트를 자제하며 지워가는 것이 여전히 힘들다. 더 좋은 영화를 알게 되고, 더 좋은 음악을 알게 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하지만 놀랍게도 마이페이보릿이 버티는 힘은 바로 이 자제의 힘이다. 가끔 조금씩 오버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교훈을 자주 되새기며 자제하는 건 거의 루틴이 됐다. 지금도 100%의 자제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번 고민하며 자제하고 있다. 하긴 100%의 자제라는 게 있을까? 100% 자제하면 그건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 걸 테니 말이다. 


오늘도 한참을 스크롤해야 맨 끝줄에 도착하는 긴 주문서 안에서 각자 '난 꼭 있어야 하는 제품이지'라고 말하는 제품들과 내 자제력을 테스트 중이다. 그렇게 자제해도 재고는 조금씩 늘어간다. 그래도 자제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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