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안다고 생각했던 잘 모르는 이야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되었던 '피노키오'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버전으로 2022년 또 한 번 선보였다. 최근에만 해도 로버트 저메키스 연출, 톰 행크스 주연의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가장 기대되는 버전은 델 토로 감독의 버전이었고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피노키오'야 말로 델 토로가 가장 좋아할 만한,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성격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워낙 디즈니 동화 버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쉽게 연상할 수 없긴 하지만 모든 장막을 걷어내고 생각해 보면, 생명을 불어넣은 나무 인형 피노키오와 그가 겪게 되는 일련의 일들 (서커스 같은 무대에 휘말려 공연을 하게 된다거나, 고래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는 일 등)에는 분명 길예르모 델 토로가 흥미를 느낄 만한 기괴한 요소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 (Pan's Labyrinth, 2006)'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거다. 그만큼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원작이 갖고 있던 텍스트를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한 것은 물론, 2022년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아름답게 완성해 냈다.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는데, 이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감독은 평소 동경해 왔던 멕시코의 스톱모션 팀과 함께 이 작업을 진행했는데, 디지털 기술이 극도로 고도화된 지금에도 아날로그 스톱모션 만이 낼 수 있는 질감은 델 토로가 만들고자 했던 '피노키오'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에 어쩌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더불어 이 기술적 성취 외에 더 의미가 있는 건 다른 작품도 아니고 이 작품이 바로 '피노키오'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탄생한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정지된 캐릭터 모형에 미세한 움직임을 수 없는 반복 작업을 통해 일종의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은 제작 과정(기법)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영화(피노키오)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함께 공개된 제작과정 다큐멘터리를 보면 더더욱 이 방식의 선택과 노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 버전의 '피노키오'가 원작과 다른 가장 큰 점이라면 역시 결말을 꼽을 수 있겠다. 원작에서는 나무 인형이었던 피노키오가 결국 인간 아이가 되는 것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남은 채 제페토의 죽음까지 마주하며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혀 다른 결말이지만 인간 아이가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로 남는 결말이 전혀 놀랍거나 충격적이지 않은 건 이 결말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해서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에 원작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둘 다 인 것 같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인간 아이가 되는 결말보다 나무 인형으로서 마지막 생명을 얻는 이야기가 몹시 당연스럽게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옳다는 전제는 물론이고, 제페토의 입장에서도 비극적인 사고로 잃은 아들 카를로를 진정으로 떠나보내게 되는 이별의 과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결말이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로서도 여전히 생각해볼 만한 작품이었지만, 자식을 잃은(혹은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제페토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마주하고 놓아주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어서 더 깊은 울림이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