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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Aug 17. 2023

오펜하이머

시대를 관통한 융합과 분열

© Universal Pictures


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시대를 관통한 융합과 분열


크리스토퍼 놀란은 최근 출연했던 국내 예능 프로를 통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구조(플롯)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다른 부분을 고려한다고 했다. 현재 활동하는 감독들 가운데 플롯을 가장 신선하고 자유롭게 활용하는 감독이라 개인적으로도 이 부분이 궁금했었는데, 놀란은 역시 플롯의 마법사답게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어떤 구조로 구성할 것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감독이었다.


그런 그에게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영화화(구조화) 해야 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 더 직접적으로 역사적 인물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들이 그러하듯 오펜하이머의 삶 역시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진부한 표현을 꺼내들 수 밖에는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하고 또 미국 역사를 넘어 인류 역사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가 리더로서 주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핵무기로 인해 인류를 더 이상 핵무기가 없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이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마주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 Universal Pictures


J.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찬반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아마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의 삶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오펜하이머의 삶 전체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모순일 것이다. 핵개발과 핵무기의 아버지라고 까지 불리는 그이지만, 나중에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주장을 강하게 펼치기도 했던 대표적인 모순점부터 태도와 행적의 크고 작은 모순들까지, 오펜하이머는 지금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그에 대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아이러니로 점철된 아이콘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전기인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게 되기 이전부터 핵실험에 성공하기까지의 일들을 그를 중심으로 풀어내고(컬러), 종전 이후 자신의 청문회와 스트라우스의 청문회 등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고통받던 시절의 이야기는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그려낸다(흑백). 관객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컬러와 흑백으로 직접적인 구분을 둔 대신 이 두 가지 시점의 이야기를 교차해 나가는 방식으로 플롯을 구성, 3시간의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 넘치는 리듬감을 준다.


© Universal Pictures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융합하고 분열하고 폭발하고 있는데, 실화 자체가 갖는 구성도 그러하고 영화의 플롯도 이런 구조로 제작되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폭탄(핵무기) 같은 폭발력과 불안정함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불안정함이란 완성도의 미흡함이 아니라 '불안정함' 그 자체로 영화 속 오펜하이머의 심리는 물론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 묘사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직접 묘사되는 핵폭탄 폭발 장면은 트리니티 실험 장면 단 한 번 뿐이고, 이후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내용은 대사와 참상을 전하는 뉴스 등으로만 전달된다 (여기서 하나 좋았던 건 굳이 자극적으로 피폭된 피해자들의 처참한 광경을 직접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직접적 묘사가 갖는 의도를 배제함은 물론이고, 영화적으로도 충분히 그 처참함을 다른 방식으로 묘사해 낸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의 요소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한 이야기임에도 오펜하이머의 불안한 심리와 다른 인물들의 불안함을 극대화한 묘사를 통해 그 어떤 액션 장르 영화보다도 강렬한 긴장을 영화 내내 느낄 수 있다.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플롯)과 킬리언 머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영화 음악을 들 수 있겠다. 놀란의 전작 '테넷 (Tenet)'에 이어 루드윅 고란손(Ludwig Goransson)이 맡은 영화 음악은 이 영화에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넣는 동시에 이 영화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인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한스 짐머가 맡았던 이전의 놀란 영화 속 영화 음악들과는 달리, 더 현학적이고 감정적인 동시에 강렬한 강약 조절과 인물들의 불안함을 증폭시켜 주는 리듬감으로 긴 러닝 타임을 가득 채운다. 영화 음악이 러닝 타임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가끔 과하다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데, 루드윅 고란손의 '오펜하이머' 영화 음악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엄청난 에너지를 융합하고 분열시켰다가 다시 폭발시키는 최고의 경험을 선사한다.


© Universal Pictures


배우들의 열연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킬리언 머피를 처음 알게 된 건 역시 대니 보일의 2002년 작 '28일 후'였는데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에도 출연하긴 했지만 그의 이름이 각인된 첫 작품은 같은 해 제작된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 2005)'이었다. 트랜스젠더인 주인공을 연기한 그는 이 작품에서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캐릭터를 잘 표현했는데 아마도 그의 팬이라면 가장 첫 번째로 많은 이들이 꼽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후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 2006)'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이 작품 '오펜하이머'로 첫 번째 타이틀 롤을 맡기까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주인공으로 나서거나 언급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간의 꾸준한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 마치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지휘하고 이끌었던 오펜하이머 같이(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쟁쟁한 이름의 배우들 사이에서도 배역의 이름이 타이틀인 주인공을 맡아 조금도 부족함 없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캐릭터를 연기해 냈다.


영화는 물론 오펜하이머가 주인공인 그의 전기 영화이기는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사실상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비중이 큰 편이다. 스트라우스의 입지가 반전되는 과정이 후반부 또 하나의 폭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는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사실 최근 10년 넘게 아이언맨으로 활동하며 할리우드의 대표 스타로 등극하게 된 그이지만, 그 이전엔 '채플린 (Chaplain, 1992)'에서 찰리 채플린을 연기하며 주목받았던 연기파 배우였다. 그렇게 잠시 잊고 지냈던 그의 연기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데, 오스카를 수상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압도적인 열연이었다.


© Universal Pictures


솔직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현대인들에게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해지며 효율이 극대화되고 있는 시대에, 더군다나 집에서도 대부분의 영화, 드라마들을 손쉽고 빠르고 원할 때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3시간이라는 러닝 타임은 일종의 도전이자 커다란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이 영화의 3시간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시간이었으며, 무엇보다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 이렇게 긴 호흡으로 긴장감을 내내 유지할 수 있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라 들뜬 마음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정말 강렬한 시네마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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