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수의 실장님

구남친도 아니고 구 실장님 타임은 오전 아홉 시

by Ashley

"야 백수야 이번주엔 취직해야지!?!"



매일 오전 아홉 시 즈음엔

혹시라도 방바닥에 퍼질러 천장뷰를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를 백수에게 '사회적인' 연락이 한 통 옵니다.








실장님 밑에서 일을 하게 된 첫날 점심,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 앞에서 성호를 긋다 둘이 흠칫 곁눈질을 했습니다.

종교가 같구나!

팀원들은 실장과 팀장이 나란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니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멈칫거렸어요.


그날부터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날 퇴근하고 환영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밑반찬만 나온 술상 앞에서 술을 한잔씩 따라두고 둘이 또 성호를 그었습니다.


의아한 팀원 중 한 분이 물었어요.

"아니, 술 먹을 때도 해요? 아니지, 술 먹어도 돼요?"

실장님은 정말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세상에 퍼진 이 나쁜 것은 얼른 먹어서 다 없애야 합니다!!"


천주교는 음주를 금하지 않으니까요.

여담이지만, 아는 신부님 중에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술 센 분이 계십니다.







첫 만남의 그날도 우리는 소주를 앞에 두고 인사했는데

사직서를 수리하신 그날도 우리는 소주를 앞에 두고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건

한 살쯤 더 나이 먹은 우리, 그리고 무거운 공기.


성호를 긋고, 술을 한잔 따라 주셨습니다.

둘이 말없이 잔을 부딪히고 잔을 비웠어요.

소주가 참 달았습니다.

신경을 쓰면 소화가 안 되어 내내 공복이던 그 날,

차디찬 소주 한 잔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속이 참 뜨거워졌습니다.



둘 사이엔 그저 무거운 공기만 흘렀습니다.

서로 잔을 채워주고 말없이 건배를 하고 또 말없이 비우고를 세 번쯤 했을까 싶을 때

먼저 말을 꺼냈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저는 보았습니다.

정말 강인한 분인 줄 알았는데, 실장님 동그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요.

"미안하다, 진짜 너무 미안해"



굳이 그간의 이야길 시시콜콜 구구절절 털어놓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을 공유하던 실장과 팀장 사이에 오고 갈 법 한 단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말없이 눈물이 났어요.

그때 처음으로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미, 지나가버린 일 들이에요.

저는 그런 것에 감정을 소비하여 괜한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바로 취직해야지?"

"아뇨, 조금만 쉬고요. 저 정말 지쳤어요."











무덤덤하게 그냥 백수가 심심해서 끄적이던 글 이었는데

곱씹다 보니 그날의 감정이 훅 치고 올라옵니다.

코끝이 시큰거리려는것을 애 먼 커피를 들이키는것으로 누르고

잠시 창밖을 보다 왔어요.



꽃비가 흐드러지는 봄날입니다.

찬란한 봄날의 낮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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