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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Sep 24. 2022

미성숙한 감정 표현과 그에 관한 타인의 아픔에 대하여

"새 보러 간다" - 김금희 



차분하고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자신의 감정을 팝콘처럼 터뜨리는 사람과 함께 있는 때까지도 분노와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속 김수정처럼 그것들이 알 수 없는 무력감으로, 조용하지만 큰 분노로 쌓일 수도 있다. 조용한 자의 내면을 쉬이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걸 느꼈다. 


김수정의 어릴 적 이야기를 가만히 보자. 김수정의 어린 시절 그 담임선생님은 어릴 적 알아주는 장난꾸러기 남자애를 좀 더 편하게 통제해보겠다는 목적으로, 김수정이 차분하고 성숙해보이며 믿을만하다는 이유로 김수정과 그 남자아이를 짝으로 앉혔다. 선생님은 본인이 해야할 일을 조금 더 쉽게, 편한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본인이 해야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어린아이였을 뿐인 김수정에게 짐을 떠넘긴 것뿐이다. 어린 김수정은 희생양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그 남자애가 나름 덜 말썽을 피우게 되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하면, 모두에게 좋은 해피엔딩인가

어린 김수정의 생기지 않았어도 좋을 분노는. 자라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안에서 커져버린 분노는?


김수정과 윤과의 관계에서는 김수정의 어린날의 상황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지만, 비슷한 점도 많아 보였다. 일단 김수정과 윤과의 관계는 비즈니스적인 이유로 김수정이 알아서 '을'을 자처해야하는, 직장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관계라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스스로 목표인 책 계약 발간을 위해 요령있게 최소한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술기운의 힘을 빌려 속이야기도 토해내듯 꺼낼 수 있다. 사회적 경험으로 단련된 나름의 처세술로 '조금 덜 힘들게' 장단을 맞출 수도, 그리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세번의 짦은 만남도 그녀가 느끼는, 참아야만 하는 버거움과 고단함이 너무 생생해서 머리가 아팠다. 

자신의 감수성과 취향, 자신에게 즐거운 이야기, 자신의 온갖 감정을 (자기가 원하는 타이밍에) 쏟아내는 윤과 함께 있으면서 그녀는 그것을 오롯히 받아주고 참아야 한다는 것이,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다. 윤을 만난 두번째 만남에서 그의 기를 어느정도 꺾어낸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냈다 해도, 그녀는 그와 헤어지는 길에, 먹지도 못할 국화꽃빵을 품안에 두고 그 온기로서 고단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것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보며, 그 무력감이 먹먹히 전해져왔다.


말로 표현해내지 않고 차분하고 안정적인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은 이들의 감정을 다 받아낼 이유는 없다. 그 사람이 (이 작품에서의 '윤'처럼) 아주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성이 넘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본인의 감수성과 예민함을 쏟아낼 자격은 없다. 

본인의 그 감수성을 기꺼이 함께 느끼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자극이나 충만한 감성을 느끼게 되어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 이상. 과정이 힘들고 벅차다면 폭력의 일종이 될 수도 있다. 최소한의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로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걸 강요해선 안되지 않을까. 


이처럼,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많은 김수정들은 오늘도, 

본인의 감정과 고단함을 애써 숨기고 이를 마음껏 표출하는 이들의 감정을 받아내며, 견뎌내며 살아간다.

나또한 그 과정에서 철저히 을이 되어본 경험도 있고, 나도 모르게 갑이 되어본 경험도 있었기에, 

어쩌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그 감정을 표출하는 갑의 위치가 되었더라도 상대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가 '노력하고 있는' 차분한 태도와 참는 마음에 내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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