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기억에 대한 다른 고통에 놓인 사람들의 사랑

존엄과 자유 의지를 지켜주며 같이 싸워주기, 다소 불안정하더라도.

by 나봄



메모리(Memory) - 미셸 프랑코


못 잊어서 괴로운 사람과 자꾸 잊어서 괴로운 사람의 사랑.


때때로 인간은 기억 때문에 괴롭고, 또 기억 때문에 산다. 실비아와 사울은 특히나 인생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의미가 큰 사람들이다.


1. 기억 때문에 괴로운 사람, 실비아.

실비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치료 모임을 정기적으로 참석해오는 것 외에는 복지사로서 일하며 멀쩡히 일상을 지내오는 사람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녀는 10년을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으며 나름 극복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에 작은 침입이라도 느껴지면 그녀는방어의 날을 세운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겪은 상처가 너무도 커서, 오랜시간 괴로웠다. 현실의 자신은 그 시기를 벗어난 지 오래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기억의 나로서 고통 속에 있다. 아마도 그 기억을 잊고자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것이고 그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또 오랜시간 싸워와야 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그 후 성인이 되어 자녀를 갖게 된 현재의 시기에서도, 자신이 당한 고통의 기억은 다른 의미로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에게 해로운 그 기억과 알코올을 자신의 삶에서 떨쳐내려 부단히 홀로 싸워왔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붙들고 살더라도, 종종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현재로 불현듯 찾아오면 심각하게 흔들리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이 옅어지지만 간혹 그 기억이 강렬한 상처로 점철된 트라우마로 남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더 짙어지기도 하고, 부풀려지는 과정에서 기억이 왜곡되기도 한다.


고통에 대한 그녀의 일부 기억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사울에 대한 기억이 왜곡된 것을 보아 영화는 그럴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이는 아마도, 그에게 연민이든 어떤 것이로든의 이유로 마음을 열게 될 자신이 두려워 처음부터 그를 “가해자”로 포지셔닝해야만 그를 자신의 삶에 끌어들이지 않을수 있다는 무의식의 작용이었을 수도.) 하지만 확실한 가해와 피해의 현장의 실체는 또렷히 남아있다. 목격자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를 가장 보호해야 했을 당사자(부모)가 그녀의 기억은 왜곡된 것이며 부풀린 것이고 나아가 거짓말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더 큰 비극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입고도 가장 가까운 또다른 사람에게마저 피해를 피해라고 명명받지 못했고, 피해자로서 받아야 할 위로와 어린 아이로서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가족을 깬 가해자의 역할까지 부여받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어찌하지 못하고 제대로 아파하고분노하지도 못했으리라.


실비아를 통해 과거의 상처로부터 나아가고자 발버둥치지만 그에 단단히 묶여있는 자의 고통을 본다. 그리고 영화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족-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의 상처의 흔적을 감히 예상해버리게 한다. 끊어내기 어렵게 나와 엮여있는 존재, 가족이 내 상처의 당사자라는 것은 인정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이유로(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이유로) 나의 상처를 드러내지도, 치유받지도 못했던 그녀의 고통은 헤아릴 수도 없다.


2. 기억을 잊어서 괴로운 사람, 사울.

반면 사울은, 기억을 자꾸 잊어버려 괴롭다. 불현듯 찾아온 병은 그에게 기억을 차츰 잃게 했다. 과거의 기억은 물론 현실은 아니나, 그 기억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과 가장 행복한 추억에 연관이 있기에 기억을 잃은 자신이 되는 게 두렵다. 자신을 잃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 두렵다. 사울은 간혹 현재 상황과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될 때면, 그런 자신이 너무나 낯설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가족들은 현실적 상황 내에서 그를 보호해야한다는 명목 아래 (결과적으론)그를 통제하게 된다. 그들은경제적 부분, 현실적 문제들을 고려하면 그를 통제하는 수밖엔 없다고 항변한다.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이지만 사울의 입장에선 갑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짐덩어리가 된 기분이다. 기억들이 떠오를 땐 원래대로 살아있는 느낌이 들고 멀쩡한 자신임에도, 혼자 무언가를 하기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나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사는 의미를 더이상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완전한 통제에 놓아두려 한다. 이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보다도 자신이 “통제하기 편한 상태“가 될지에 대한 것만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의 삶에 대한 자유 의지와 의사는 아예 무시한 채 그를 가둬두는 형태로 그를 살려두는 것이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일상 생활의 안전장치를 해주되 그가 살아가며 하고자 하는 것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포기해갈 수 있게는 해주는 것이 그를 위한 최소한의 존엄이 아닐까. 어차피 그에게는 스스로 삶의 여러 가지 것들을 포기하는 것 자체도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삶의 여러 가능성을 포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그의 존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3. 그런 그녀와 그가 만나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안는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것-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쏟아내고 아이처럼 울고 분노-을 한다. 자신의 품에서 따듯한 곁을 내어주는 그에게 안락함을 느끼고 잠시나마 과거의 상처보다는 현재의 따뜻함에 쉬게 된다. 그리고 아픈 그를 보호하고 사랑을 주며 오히려 스스로도 치유한다.


그 또한 그녀와의 시간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녀는 그에게 단순한 가족으로서의 책임이 아닌, 정말로 함께하고 싶어서 함께 시간을 나누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은 자꾸 잊어가지만, 현재를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그녀를 그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해주면서” 스스로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편안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그/그녀의 가족들은 정말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사랑했을까. 그들 곁의 일부 가족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그저 그들 곁에 머무르는 것으로 그 죄책감이나 안타까움을 해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가족들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상처를 외면하거나 존엄의 문제를 무시하여 사실상 그들의 삶의 의지를 가장 크게 박탈시켰다. 가족이기에 더 아픈 상처가 되었을 터다.


실비아와 사울은 가족은 아닐지라도 그들을 정말로 아끼고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상처만 조용히 껴안고 (내부적으론 폭발하는공포를 외부적으론 조용히 감내하고 살 뿐으로 보이는삶을) 살기 보단, 조금 더 주도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와 그녀가 스스로 상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줌으로써. 하지만 불안정한 그들이 서로에게 현실의 삶에서 가족과 같은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흐릿하게 마무리된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만으로 현실의 문제가 다 해결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엄과 자유 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가족의 책임만을 지려는 것은 아픈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니다. 불안한 상태 속에서도 서로에게 사랑을 주며 현실 안에서 따로 또 같이 굳건히 살아갈 방법을 함께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가족-동반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조용히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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