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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옥 Dec 11. 2020

시간과 같은 속도로 걸을 때

좋아하는 시간

 2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서울에 올라와서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 한 이후 5년간 나는 늘 시간에 쫓기며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 채 살아왔다. 그때 나의 시간은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여기저기 치이면서 밥 먹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이 많은 일에 시달려 버티고 견뎌내야 했던 시간 그리고 퇴근하고 난 후와 쉬는 날 불규칙한 수면으로 질 나쁜 잠과 건강한 음식이 아닌 그저 먹기 편하고 배만 겨우 채울 수 있는 식사 그리고 가끔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보냈던 시간.

나는 온전히 하루하루를 느끼면서 살아가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한 달이 흘러갔는지 조차 느낄 새 없었다.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매달 한 번의 문자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5년 동안 나는 시간과 같은 속도로 걷지 못한 채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된 해, 그리고 결혼식을 4개월 남겨두고 결혼 날짜를 잡았던 5월의 마지막 날.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직검사 상 갑상선 유두암 5단계 소견으로 암이 75프로 이상 많이 의심되는 결과이며 수술을 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 날 하루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을까 이 상황을 이 시간을 부정하며 그저 울기만 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다음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토요일 아침이 왔고 주말 동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책도 읽고, 청소도 하고, 바람도 쐬고 계속 무언가를 하려고 시간을 보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이라 생각했던 시기인데 고작 1cm가량의 암세포 때문에 마냥 슬퍼하고 주저앉은 채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얼른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해서 예정대로 결혼식도 올리고 다시 제대로 나의 시간이 흘러가도록 하자고 생각했다. 씩씩하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을 믿고 다독여 가며 수술 준비도, 결혼 준비도 차근차근하였다.


 그저 슬픔에 잠겨 우울하고 힘든 나날들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수술을 받고  4주의 병가를 받게 되면서 잠시 멈추어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하루 다시 건강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매일 시간을 온전하게 보내려 노력했고 시간과 같은 속도로 걸으면서 4주의 시간을  보냈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 엄마가 만들어 준 집밥으로 가족들과 함께 삼시세끼 건강한 식사를 하고, 낮에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기 전 부모님이 같이 운영하시는 가게에 들러 엄마와 함께 집에 가는 길 팔짱을 끼고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천천히 걸었다. 저녁엔 거실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언니와 아빠도 다 같이 오순도순 모여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집 근처에 있는 남강을 걸으며 좋은 음악을 듣고 이곳저곳 풍경 사진을 찍고 예쁜 하늘도 맘껏 보았다. 보고 싶었던 친구들도 만나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천천히 음미하며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한수희 작가님은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배운 일은 오직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시간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불행해진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내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생활의 여기저기에 끼워 넣는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일들을. 천천히 산책하기. 천천히 달리기. 커피를 볶기. 빵을 굽기. 식물을 기르기. 차를 마시기. 수건을 삶기. 텃밭에 농사를 짓기. 책을 읽기. 지하철을 타기. 적금을 붓기. 1년에 한 번 교토로 여행을 가기.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커피를 만드는 시간 中)


이렇게 매일매일 보내면서 깨달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시간과 나란히 걷는 방법을.

그리고 시간과 나란히 천천히 걸을 때 나는 행복해지고 좋아진다는 것을.


 수술 후 이제 겨우 5개월이 지났고 다시 바쁜 전쟁터의 직장으로 돌아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며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하루를 보내는 태도가 달라졌다. 매일 하루를 보내는 동안 시간과 나란히 걸으려 노력하며 하루하루 온전히 시간을 느끼고자 노력한다.


잠을 깨우는 새벽 6시 알람 소리에 겨우 눈을 뜬 순간, 바쁜 아침 속 5분 동안 가벼운 스트레칭과 아침식사를 챙기는 시간 그리고 일하는 동안 창문 속으로 들어온 따뜻한 햇살과 마주하는 시간, 퇴근길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그리고 퇴근 후 배달음식보다 간단히 차려먹기 위해 오빠와 장을 보는 시간, 자기 전 오빠와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시간, 침대 위 작은 램프에 의지해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 중에도 조금씩 시간의 속도에 맞춰 걸으려 노력하다 보면 그 속에 내가 좋아하는 시간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 시간들이 아주 소소하고 작을지라도  차곡차곡 쌓여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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