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
시작..
전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게임 배경원화가 그게 저였답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전 손에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렸고,
학교를 가기도 전부터 엄마손을 잡고 사생대회에 나갔었어요.
그리고, 미술학원을 오래도 다녔죠.
대학은 당연히 미대를 갔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싫어서 제가 선택한 과는 '공예과'
재밌었지만,
정신을 차라고 보니 전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게임회사에 취업하게 되었지요.
그게 2011년, 9년 전이네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어요.
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예술가는 아니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를 꿈꿔요~
아니, 그림을 좋아하던 어린 제가 꿈꿨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 '우와~' 심오한 작가의 세계!
태어나 줘서 감사합니다 예술가님! 덕분에 눈이 호강합니다.
소장하고 싶은 예술가님의 작품을 제가 사고 싶어요!!!!>
뭐 대충 이런 말들을 해주고 칭송해주는 그런 꿈입니다.
하지만 전 이쪽은 아니더라구요.
제 그림은 그렇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굉장한 재능이 느껴지는 그림도 아니고,
저도 제 능력을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것보다,
회사에서 필요한 적절한 그림을 뽑아내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게임이란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행복하게 일했습니다.
덕업 일치를 이뤘었죠.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삶의 만족도도 높았고, 회사생활도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전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어요.
당연히 회사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요.
일도 잘했고, 좋아했고, 잘 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어진 1년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저에겐 회사로 돌아갈 수 없는 단 한 가지의 이유가 생겼어요.
아이.
내 아이.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 무엇도 지금의 시간을 제게서 뺏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그런,
꼭 지키고 싶은 사랑.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자라요.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힘들어 죽겠던 시간들이 행복으로 가득 차 버린 심장으로 바뀌고,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이 아까워 눈물이 나고..
회사를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언니들이 했던 말들이 생각났지요.
"어린이집에 빨리 보내고 회사에 출근해야 되는데 아이가 늦게 일어나서는 꾸무럭꾸무럭 대서 어찌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린이집에서 우리 아이가 우울증인 것 같다고,, 하루 종일 아이가 놀지도 않고 울었데.."
"너무 힘들어, 남편은 혼자 회사에 다니나 봐, 아이는 온통 내 차지야, 좀 쉬고 싶어."
전 이 말들 속에서.. 아이들이 느낄 좌절감과 외로움에 공감해 버렸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벌 돈들이 정말, 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값질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채웠죠.
오래 고민했습니다.
주변을 어떻게 설득할까.
지금까지 벌던 돈이 있는데 과연 남편이 벌어오는 돈 만으로 괜찮을까?
남편과의 대화는 쉬웠습니다.
남편은 우린 할 수 있다고, 어려운 선택을 한 절 응원해줬고,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을 이렇게 놓아버리게 됨을 많이 아쉬워해 줬어요.
부모님은 속상해했고,
시부모님은 미안해하셨고,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죠.
그렇게 전 아기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육아를 한다는 게 날 희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끔찍하게 싫었어요.
내 아이에게 널 위해 날 희생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에게 널 낳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즐거운지, 꼭 삶으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전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단지, 아기의 엄마로 남아 "엄마는 아기만 잘 키우면 돼!"라는 말로 숨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죠.
물론 지금도 몰라요.
그냥 뭐든 해보자 싶었어요.
조건은 어떤 일을 하던 아기에게 집중할 것.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일기를 쓰자! 일기를 그리자~
2019년 12월 4일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기로 채워 가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 그림체로, 단순하게!
전 깜지입니다. 육아를 하고 있고, 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를 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분씩 한분씩 그려 드리고 있답니다.
전, 앞에서 말했듯이 적절한 그림을 잘 그리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 상황들을 적절하게 그려드리고 싶었어요.
항상 제 이야기를 봐주셔서 감사했거든요~
덕분에 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있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의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삶 하나하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현재의 나에게로 다시..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고,,
저는 앞으로도 일기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드릴 것입니다.
아이와의 하루하루를 기록해 두면 아이가 언젠가 자라,
글을 읽을 때가 되면,
제가 기록한 날들을 봐줄 테죠. 그 생각 만으로도 뿌듯한걸요.
그리고, 제가 그려드린 이야기를 보고 위로받고 행복해할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 만으로도 제 삶은 풍요롭습니다.
일주일에 한 분씩 신청해주신 순서대로 그냥 그려드리고 있으니.
신청해 주셔도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그림을 그려드리는 때 까지요.
하지만, 늦어도 꼭 그려올게요!
당신의 이야기도 신청해주세요~
이게 저의 시작입니다.
육아를 시작하며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시작한 이 일..
어디로 갈지 모를 막막한 평야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지만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