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First step

출국

by 더스크

이른 새벽 공기는 차고 말라 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나를 기다리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독 밝게 보였다. 나는 불빛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그것은 불빛에 이끌려서가 아닌 내 의지로 내딛는 발걸음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치 한 달 전 제출한 사표처럼.


20년간의 직장 생활의 종지부는 뜻하지 않은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계기로 찍히게 되었다. 남편이 회사의 지원을 받아 1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정관에도 있는 배우자 해외파견 휴직을 회사에서 정당한 사유도 없이 거부하는 바람에 사표를 내게 된 것이다 - 퇴직에 이르기까지의 맘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이를 다시 곱씹어 이 글도 내 기분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에는 적지 않으려 한다. 이후의 글에는 회상씬으로 가끔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한참이나 어린 인사담당자는 미국 1년 가는 게 뭐가 대수냐는 듯 비아냥대며, 남편과 따로 살거나 육아휴직을 쓰라고 말했다. 나에게 아이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육아휴직을 들먹인 것이다. 나에게는 가족이 남편뿐이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아, 물론 건강도 중요하지. 선택의 기로에 서자 우선순위가 분명해졌다. 긴 직장생활로 몸도 마음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랜 기간 불면증에 시달렸고 원인불명의 열이 몇 달간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명백한 번아웃의 신호였다. 20대 때 형편이 어려워 경험해보지 못했던 외국생활의 기회가 뒤늦게 찾아온 건,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떠남이 필요한 순간임을 미리 내다본 신의 배려였을 지도 모르겠다.


기회는 남편을 통해 왔지만 내 의지로 퇴사를 하기로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안정적인 직장이었기에 대부분 만류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많은 축하와 응원을 받았다. 회사의 처사에 자기 일처럼 분노해주는 동료들 덕에 상처도 금세 아물었고 용기도 조금씩 솟아났다. 처음의 불안했던 마음은 정작 퇴사일이 다가오자 홀가분함만 남고, 자꾸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들, 모두 수고하세요. 전 더 이상 수고하지 않을 거예요!'

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회사를 떠나온 것이 일주일 전이다. 그 후 출국날까지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여러 가지 준비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새벽길은 한산해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 이륙 준비로 분주한 비행기들을 바라보니 지난 시간들이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지는 다가올 시간들. 설렘과 두려움,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행복감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잘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묘하게 어우러져 달뜬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Every adventure requires a first step

체셔 고양이의 말대로, 어떤 모험도 첫걸음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이 모험이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할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모험에 나선 것 만으로 이미 행복이 시작되었으니까.



§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니 기내식조차 반가워 잘 찍지 않는 사진을 다 찍었다. 여행 다닐 때의 습관이 배어서 나도 모르게 튜브 고추장을 챙겼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고추장은 큰 통으로 사야 할 터인데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상큼한 하겐다즈 딸기 아이스크림이 무척 맛있었다. 딸기를 먹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미국 딸기는 과일의 탈을 쓴 야채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 동안 먹지 못할 한국 딸기가 벌써부터 그립니다. 한편, 1년이나 보지 못할 한국이라 하늘에서라도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싶었는데 창가 자리가 아니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비행기는 언제나 창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이유.

keyword